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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컴퓨터가 내 정체성 변화에 미친 영향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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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컴퓨터가 내 정체성 변화에 미친 영향 엿보기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3.12.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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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비 김봉길 이사

컴퓨터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까?
컴퓨터는 내가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삶의 최고 수단, 아니 목적이 되는 듯하다.
내 정체성도 점차 컴퓨터와 연관되는 듯.
가칭 컴퓨터철학이 등장하는 이유다.

◆나의 정체성 확인 수단의 변화 조짐
플라톤 <파이돈>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며 ‘빌린 닭 한 마리 값을 갚아주게’라는 부탁을 친구에게 했다고 한다. 병이 나으면, 의술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당시의 문화 때문이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도 사는 일 자체를 욕심꾸러기 영혼이나 마음의 치유과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죽음으로써 그 욕심의 병이 나았으나, 빚을 갚을 방법이 없자 친구에게 부탁한 것. 그럴까? 육체의 욕심은 죄가 아니고, 영혼이나 마음의 욕심은 죄일까?

참 오랜 세월이 지나며 그 ‘닭 한 마리’ 이야기도 이제 무척이나 다양해졌다. 누구의 육체 혹은 마음 그 어떤 정보든 데이터로 담을 수 있는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렇다. ‘영원한 진리는 없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 육체니 영혼이니 마음이니 하는 용어들이 컴퓨터에 의해 해체되는 듯한 느낌 앞에선, 순간이나 영원함이나 그저 숫자의 나열이라는 무의미함 그 자체다. 이럴 땐, 허, 참 묘하다. 지금까지 지녀온 나의 알량한 정체성이라니!

내 정체성? 나의 오래된 기억부터 최근 체험하며 지내온 나날이 만든 내 정체성이란, 어쩌면 현실에 잘 적응하려 부단히 애썼던 세월의 껍질 아닐까? 그렇게 굳어진 경험의 뼈와 살, 그 사이마다 들락거렸던 마음, ‘뭐 그런 것들의 그 무엇’이 내 껍질로 느껴지는 것. 특히, 최근 몇 년간 컴퓨터에 의해 돌출된 블록체인이니 인공지능이니 메타버스니 하는 단어와 씨름하면서 생기는 이 생소한 껍질이라니! 자칫 그나마 남아있을 정체성이 내 마음과 함께 언제 어디서 새 껍질 밖으로 얼마나 빠져나갔는지 모를 듯하다. 스마트폰과 함께 다가온 갑작스러운 생활 변화, 그 변화로 인해 딱딱한 내 껍질들이라니.

내 껍질이니 그 속이니 하는 게 무엇이길래, 그 사이에 컴퓨터가 어떤 의미가 또 있길래, 나는 지금도 목이 마르면 물 한 잔으로 숨을 돌리며, 나만의 뭐 큰 문제인 양, 컴퓨터 앞에다 ‘컴퓨터로 인해 내가 이렇게 저렇게 됐다’라고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그래왔듯, 잠깐 며칠 지나고 나면, 새로움이란 또 뭐 그러저러한 것이거늘, 내 젊은 날 애써 다가간 컴퓨터란 이름의 대상이 내 껍질로 느껴지는 것일까. 그래, 별거 아닌데, 컴퓨터는 밥숟가락이나 운동화처럼 그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인데, 내 몸과 마음을 붙은 것인지 떨어져 있는 것인지, 컴퓨터를 뒤져가면서 남은 내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가.

◆컴퓨터가 만들어 준 글쓰기 습관 
행운 세대였을 거다. 40여 년 전, 컴퓨터 문명이란 큰 틀이 생길 무렵, 나는 국가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컴퓨터를 끼고 살았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도 일컫는 컴퓨터의 출현을 지금까지 관통해 살고 있다니, 행운 맞다. 컴퓨터 국책연구소라는 첫 직장과의 인연도 행운이었을 것. 컴퓨터로 글 쓰는 습관의 기회를 주었으니 좋게 말해서 행운이다. 그 연구소를 나온 1995년도 후반은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막 보급되려던 시기였다.

직장과 직업을 바꾸게 된 동기는 몇 권 창작집을 통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마무리 지을 수 있으리라는 도전 때문이었다. 나만의 상상이 수없이 되풀이되는 순간, 그 느낌 옮기기에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젠 그 나름 매듭지으려 한다. 아니, 이젠 마무리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도 나열돼도 괜찮다는 것, 다만 과정만 있고 결과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다. 당연지사, 내 능력의 한계를 여러 번 확인했으니 괜찮다.

20세기 말, 10년 가까이 노트북이 손에 쥐어지면서, 집 안팎을 가리지 않고 끼고 살았다. 문서 작성 습관이 연필에서 노트북 자판으로 바뀌었다. 장소와 상관없이, 앉는 자세만 나오면 많은 순간순간을 문자로 옮기는 일을 했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쫓아가는 문장이나 단어의 꼬리잡기 놀이였던 것 같았다. 배터리 수명이 끝날 즈음, 노트북을 분실했다. 그 안에 있는 원고야 그 느낌이야 머리에 있고, 또 습관을 위한 과정이었으니, 허탈 웃음 한번 짓고 아까움을 떨쳤다.

그런데, 한 번 붙은 습관은 어설픈 상상이나마 뜬구름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컴퓨터나, 펜으로 쓰는 속도는 크게 차이가 없다는 착각이 게으름을 피우게 만든 것이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물 흐르듯 생각을 문자로 남기는 일이 별것 아니구나 하는 자만이 하늘을 찌를 무렵, 책 한두 권 분량 가까운 수첩과 노트북을 어처구니없이 또 분실했다. 컴퓨터 자만이 내게 내린 엄벌일 수도 있다.

새천년이 들어서면서 수북했던 메모지와 수첩에 있는 잡글이든 어떤 글이든 그때마다 정리해 인터넷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블로그 목차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스마트폰으로 사진 이미지에 순간마다 이어진 느낌들을 컴퓨터 시화 이미지로 만들려 했다. 나아가, 목소리를 담아 동영상으로 나를 남기는 관심도 가지게 되었다. 새 취미라 해야 할 듯하다. 아니, 억지로라도 컴퓨터가 내 모습을 변화시켰다고 말하고 싶은 욕심이 분명하다.

◆점점 동생처럼 느껴졌던 컴퓨터
최근 들어, 컴퓨터가 내 정체성 확인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참으로 친근하게 다가온 이유를 더듬어보자. 아마도, 불 다루는 도구를 숨기며 사용하던 때, 그때 사람들이나, 태어나면서 컴퓨터를 장난감 인형보다 더 가까이 끼고 사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결국, 나만의 몇 행복감을 찾다가, 맛보다가, 그것을 그리워하며 사는 일, 그렇게 사라지는 것, 맞을 거다. 지금 컴퓨터로 이 문장을 쓰는 일이 뭐 특별한 즐거움이라며 웃고 있으니, 컴퓨터와 나는 분명 깊은 관계가 있다는 말, 맞을 거다.

지금까지, 잠이 들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꾸었던 수많은 꿈이 서로 섞이고 섞이다가 문득 굳어진 지금, 이 지금이 곧 나일 것이다. 물론, 컴퓨터 인공지능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섞고 엮은 순간, 더 이어질 그 무엇이 없는 순간, 하나의 의미가 남을 것이다. 언제나 지금은 나나 인공지능이나, 이 둘이 묶여진 아바타든 휴머노이드든 무척 친근해지고 싶어진다. 이런 상상 속의 컴퓨터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나의 새로움이요 즐거움이라 느껴지다니! 한 번은 내가 고개를 쳐들면, 킥킥 웃으며 고개를 쳐드는 컴퓨터라니….

그랬다. 지나면 모두 허상일 것이다. 이 세상은 감히 다 느낄 수 없는 경우의 즐거움이 존재했다 사라지는 것처럼. 그 수보다 더 새로운 것들이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갔다 했을 것, 또 그럴 것. 수없이 나를 지나친 ‘나를 새로 느끼는 즐거움’을, 뭐 그게 그거다며 멍하니, 그 뉘 것인 양 쳐다보았을 것. 혹자는 그 어떤 것을 꼭 잡고 ‘바로 이것이 새롭다’며 내 행복감으로 삼기도 했을 것. 나는 왜 여기에다 무슨 컴퓨터와 관련이 있다고 고집을 피우고 싶은 것일까.

그래, 그래도 나는 컴퓨터와 거의 하나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스윽 머리카락 사이로 돌아다니니, 어쩔 것인가. 웃긴다. 나는 컴퓨터를 사랑하는가. 참 우습다. 모르겠다. 언제 먼 시간이 흘러, 나 같은 사람을 컴퓨터가 사랑한다고 하며 쫓아오고, 그 나 같은 사람이 컴퓨터가 싫다고 도망 다니며 ‘너는 내가 아니야!’ 외칠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마 그즈음이면 컴퓨터는 이미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되어버릴지 누가 알겠느냐는 거다.

분명, 나는 컴퓨터를 사랑하지 않는다. 컴퓨터를 40년 넘게 끼고 살다 보니, 그냥 내 지나온 오래된 습관, 컴퓨터가 곁에 있어야 마음 한구석 안정되었던 것, 그저 내 고유성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누가 나를 보더라도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을 거다. 한때, 쪽지나 수첩에 연필 혹은 볼펜으로 순간 스치는 느낌을 그때마다 남기려는 습관이 나만의 큰 즐거움이라 여겼었다. 그러한 그 즐거움이 컴퓨터 앞에 앉아도 마찬가지라니, 참 묘하다. 이 시간을 내가 만들어 온 것이기에, 컴퓨터가 생소한 동생처럼 느껴지니, 이를 어쩔 것인가! 참 흔히 말하는 개똥철학이다. 하하, 참고로 나는 평생 동생이 없다. 

◆컴퓨터철학, 그 섣부른 상상 변명
‘현대’라는 단어는 아마도 어릴 때 들어 왔었을 것. 학교 때 들었던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의 역사 구분만이 지금은 ‘현대’ 개념으로 막연히 남아있다. 그저 대충 내가 태어난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까지 현대인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참 우연이긴 하지만, 굳이 컴퓨터의 등장 시기와 비슷할 것이니, 컴퓨터 시대와 현대라는 개념은 한 영역에 들어갈 듯도 하다. 이 전제는 지금 살아있는 80억 인구가 컴퓨터와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을 것. 이로 인해, 나도 현대인으로서 인용이 가능한, ‘컴퓨터철학’이란 용어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와 같은 이들이 삼삼오오 늘어나게 된다면, 점차 실존철학이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놓고 토론하게 되지 않을까.

일견해서, ‘컴퓨터철학’은 컴퓨터 생활화로 점차 발전해, 과학철학의 한 가지로 그림이 그려지겠구나 하는 상상이다. 즉, 컴퓨터와 정보 기술이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기에, 어느 시점 어떤 순간에는 컴퓨터를 떠나 삶을 존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생사의 그 절대 기준의 방아쇠를 가질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문화, 예술, 경제, 정치, 환경 등의 단어를 제치고 어떤 것보다 고귀하게 사용될 것이라 미리 쓴 들,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그렇다. 결과론적으로 ‘과학철학’을 건너뛰어 ‘컴퓨터철학’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면, 컴퓨터에 관한 나의 의미를 어느 정도 가늠해 두어야 할 거다. 모든 생활 수단에 컴퓨터가 사용되기에,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먼저 확인하는 일일 거다. 또한, 나와 인공지능과의 관계 설정에 따른 내 정체성 유지를 위해 가져야 할 마음 정립도 병행해야 할 거다. 

몇 개 예를 들어보자. 우선 ‘컴퓨터철학’은 3차원 프린터, 드론, 자율주행 자동차 등의 사용에 따른 윤리적 기준이라든지, 인공지능 의사결정에 내가 개입될 때 내가 가질 도덕적인 책임 범위를 규정할 때 어떤 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내 딴에 세운 기준의 기본적인 문제로서 정보의 자유와 개인 정보 보호 범위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에 대해 도움이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당시 현존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은 컴퓨터에 의해 숫자로 표기되는 기술이 상용화되리라고 한다. 즉, 어떤 의미든 나타내어질 수 있는 최소의 단위로 나누는 기술이 나타날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최소 단위를 저장하고 가공하게 됨으로서 의미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질 것. 모든 것은 의미가 서로 있는 숫자들의 조합으로 나뉘었다가 서로 묶이는 일련의 토큰화 과정이 그때 시기마다 다양화되리라는 전망이다. 그때는 가상 현실과 현재 현실 간의 상호 경계가 모호해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험이 중첩되면서 일어나는 내 존재감 느끼기에 어떤 행동지침이 가장 적합할지도 ‘컴퓨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관련지어질 수도 있을 것. 

몇 년 전부터, 이젠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으면 한 적이 있었다. 현재 존재하는 기술만 잘 활용하고, 우리 사회는 더 변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과연 컴퓨터 기술이 꼭 발전해야 한다면, 그때마다 그 범위와 방법 등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 역시 ‘컴퓨터철학’의 관점이 담담해야 한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서로 경쟁하는 컴퓨터 이론이나 기술을 어떻게 제한할 수 있을까? 가능할까? 내가 더 누구보다 의미 있다고 우기고 싶은 본능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도 인생 목적이 아닌 생활 수단으로서 컴퓨터 철학의 영역이 될 수도 있겠다.

◆심심할 때마다 울타리를 옮기려는 이유
지금도 심심할 때면, 아니 내가 무엇을 해야 즐거운지 모를 때면, 그 순간 만들어진 울타리를 느끼게 된다. 그 안에 갇혀 웃고 울고 떠드는 것만이, 그런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이 ‘아 그래 난 살아있어!’ 하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이었다. 물론 평생 몇 번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느낌을 더 맛보고 싶어 무엇인가 집중하려 했다. 꼼짝 않는 내 속의 숯 같은 조각을 잊기 위해, 가끔 내 한쪽 울타리를 컴퓨터가 없는 곳으로 옮기려 했던 모양이다. 내 몸이야 컴퓨터 안에 들어가 춤추고 있을망정, 내 그 무엇은 컴퓨터와 상관없는 울타리 밖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 

최근 며칠, 아마도 내가 경험해 알고 있는 진리란, 진정 변해야 한다고 되뇌며 지냈다. 결국, 나는 어떤 진리도 변한다고 나에게 강조하려 했던 것. 그렇게 끊임없이 내 정체성도 어떻게든 변해야 하리라며 처음 본 바늘로 내 심장 귀퉁이를 찌르고 싶었다. 지금도 계속 쌓이고 삭제되는 컴퓨터, 폐기되고 새로 만들어지는 컴퓨터, 일주일이 멀다 하고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지는 스마트폰처럼, 새로 달라진 울타리를 만지고 싶다며 말이다. 

어쩌면, 다가오는 세상에서는 점점 컴퓨터가 인간 말을 듣지 않으려 할 거다. 벌써 나는 몸과 마음 두 개의 아바타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려는 것 같으니. 그러니 컴퓨터보다 더 새로워지도록 나를 꽉 붙들어야 할 일이다. 그런 나를 발로 밟고 내 울타리 꼭대기에 올라서지 않는다면, 어찌 감히 ‘새로운 저 멋진 나’를 만날 수 있으랴. 소크라테스의 ‘닭 한 마리’와 ‘마음 데이터 한 묶음’이 서로 어떠하다며, 지나가는 나그네와 감히 담론을 나눌 수 있으랴. 

info@blockchai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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