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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컴퓨터문명, 그곳으로 가는 단어 쓱 만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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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컴퓨터문명, 그곳으로 가는 단어 쓱 만지기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3.11.1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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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비 김봉길 이사

AI, Humanoid, Avatar, Metaverse 등
앞으로도 수없이 단어는 진화할 것
생존을 위해, 또 자유를 향해
지금도 이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다닐 것
그런데, 나는 그 어느 즈음에 있는가?

◆나를 이루는 단어 몇 개 느끼기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 마스크를 벗고 다니기 시작할 무렵, 또 다른 팬데믹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우려를 한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을거다.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사는 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괜히 남은 나의 날들은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생각 조각조각을 삼삼오오 나누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나누고, 이것은 즐거움 저것은 포근함, 뭐 이렇게 나누며 하루를 매듭짓고 싶기 때문일 것.

최근까지 대부분 코로나 증세로 집안에 갇힌 적이 있었다. 왜 갇히게 되었는가를 논할 이유도 없이, 이 기간, 먹고 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 신체 활동에 집착하면서, 남은 시간에 책 읽기, 동영상 보기 등으로 그 지루함을 달랬으리라. 나도 그랬다. 내가 사용했던 단어가 단순해졌음을 느끼면서, 무척이나 무미건조해져 있는 나 자신의 조각들과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겨내려는 다른 도전이 새로운 단어를 손에 쥐게 했으리라. 

인간 모두 어느 지금 그 순간, 그때마다 아직 남은 날을 떠올리곤 한다. 누구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고 갈 이야기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때만 되면 몇몇, 내가 놀고 있는, 더 놀고 싶은, 단어를 손에 들고 확인한다. 그때 문득, 나를 위한 단어 몇 개 확인하며 나를 향해 싱긋 웃을 것. 아마도 나는 내가 쥔 단어는 SF니 AI니 블록체인이니, 진화, 창조니 하는 등이 그 알량한 것들도 있다.

물론, 나 자신을 확인하는 우선은 과거를 둘러싼 단어를 연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과거 퍼즐을 맞추다 보면 잘잘못이 드러나고 그 오류를 잘게 부수어 멋진 내 현재를 이루는 정답을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을 되풀이할 때마다 정답이 다르게 느껴지는데, 아마 이것은 내가 원하는 행복감이 그때마다 달라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다. 컴퓨터가 몸에 익으면서, 과거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단어에 대한 동경, 이 호기심이 또 다른 삶의 충동이 되어, 나를 꿈틀거리게 아니 통통 제자리 뛰기를 하게 한 것, 그래 맞다, 내 심장을 통통거리게 했다.

◆인간과 AI인간 사이의 단어들
과거를 돌아보면, 뭐 의미 있는 일을 재밌게 한 적이 얼마나 있을까, 뭐 이렇게 내 뒤를 돌아보곤 하지만, 그 순서가 이래저래 뒤죽박죽되어버리곤 한다. 미래 어느 시점에 내 모습을 두려는 이유다. 절반은 비겁할지 모르지만, 내 남은 즐거운 시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막연한 미래를 확인하고 싶은 이러한 엉뚱함이, 우리 인간을 새롭게 하는 힘의 하나라는 생각이, 부족한 변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엉뚱함이 되풀이되는 그러한 날 요즈음, 하, 하필이면 SF 영화 <크리에이터>가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간이 만든 AI, 그 AI와 인간 실수로 핵폭탄이 터지며 벌어지는 이야기, 예고편을 몇 번 돌려보는 동안, AI인간이 저렇게도 또 등장하리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전철이나 버스며, 커다란 빌딩 외벽 모니터에 <크리에이터> 광고가 번쩍거리는 날, 이 영화를 봤다. 며칠 지나며, 그 영화 속에서 뛰어다니는 몇 개 단어를 쓱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랬다, 인간 다음 AI인간이라니, AI인간 다음엔 또 무엇인가? 포유류에서 인간이 되는데 수천만 년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에서 AI인간이 되는데 불과 수백 년이 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참으로 짧은 나의 숫자놀음에 놀아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그 인간과 AI인간 사이를 오락가락하려는 나는 뭐 즐거움 조각 하나를 발로나마 툭툭 차고는 있는가. 

뭐 좋다. 인간과 AI인간 이 단어를 두고 한바탕 씨름을 하는 일이 어쩌면 살아있는 날 중의 즐거운 놀이일 수도 있겠다. 영화 제목이 하필이면 ‘창조자’라니? 이런저런 시간과 상상이 얽히며, 최근에 다시 새로움으로 다가온 <종의 기원>의 느낌이 혼란스럽게 떠올랐다. 신비주의에서 현실주의 중심의 생활 변혁을 일으키며, 모든 것은 ‘변화 과정의 연속’이다는 느낌의 전환점을 남긴 책. 이 불멸의 저서를 통해 인류 변혁의 방점을 찍은 찰스 다윈. 

◆내 욕심이 나를 진화시킨다
생물, 그 무엇이든 존재하기 위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생명이 있는 것들. 그 생명이 내게도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라며, 나처럼 이를 영광스럽게 환호했을지도 모르는 다윈. 아마도 그가 생명의 끝을 연결하는 산책을 하며 독백을 했다면,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며 툭툭 걸었으리라.

“생명! 그 태어남과 사라짐의 영원한 서사시, 자연! 그 무한함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점의 생명이 나라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최고의 동물인 인간의 하나임을 어떻게 강조해 외쳐야 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까. 

어쩌면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모든 능력이 한꺼번에 부여된 것이라 믿어야 할까 보다. 그래야 어떠한 문제도 해결될 테니, 이것만이 유일한 답일 테니. 

아니면, 우주가 움직이는 동안, 그 무한대의 문제가 만들어지고 무한대의 답이 지금도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한꺼번에 만들어지든, 그때마다 만들어지든, 상관없다. 지금 내 욕심이 나를 진화시키니까.”

참 건방진 말이지만, 다윈이 중얼거릴 수도 있었던 말들은 그동안 그 많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고민한 내용 일부라는 생각이다. 더 건방진 말이지만, 나도 그중 하나라 우기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 무척이나 오래 이어져 온 생명의 한 점, 그래 나다. 특별하지 않은 지구가 우주의 무한대 움직임에 따라 존재하는 과정일 뿐. 그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에 문득 더 만져보고 싶은 얼굴이다. 아, 그래, 인간 욕심이 곧 인간 생명인가? 그랬다, 내 욕심이 내 생명의 다른 이름.

그랬구나, 사람 생명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그래 한계가 없이 구르고 구르는 욕심 덩어리도 아름답다니. 이 사실이 나에게까지 이어져 왔고,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또 문제는 그 다른 생명이 또 내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럴까. 그래서 신화라는, 불로초라는 단어가, 천국, 영생, 영구불멸, 이상향 등과 같은 단어가 만들어졌고, 또 나도 사용하려 하는가. 지금은 AI니 AI인간이니 휴머노이드니 하는 단어에 푹 빠진 채, <크리에이터> 같은 영화를 더 보고 싶어 몸살을 앓는가.

◆혼란스런 단어 놀이에 대한 반성
어쩌면, 내가 언제 태어났든, 계속 새로 다가오는 그때에도 지금처럼 존재하길 바랄 것이다. 하여, 내 생존본능은 어떤 것이 내게 올지 모르는 것에 대한 상상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헤맨 적이 있었거나 또 그러할 것. 나도 그러했으니, 생존했던 2000천억 정도의 인류가 나처럼 떠올린 상상은 그림이 되고 소설 또 음악이 되어 내 현실 앞에 <크리에이터> 같은 SF영화로 나타나 있는지 모른다.

100년 전부터 시작된, 과학적 상상의 결정체인 SF소설이나 영화는 지구 밖에서 생길 법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컴퓨터의 생활화는, <크리에이터> 영화 소재인 AI처럼, 이제 인간이 만든 컴퓨터 안에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고도 있다. 물론, 인간이 더 생존하기 위한 모습을 펼쳐내는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같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나 자신부터 행복해지고 싶으니, 나를 중심으로 행복한 이야기만 펼쳐지길 바라니 같을 수밖에. 

과연 나는, 나의 남은 날을 위해, 어떤 그 무엇이 더 의미 있다고 확인하려는 걸까. 컴퓨터라는 공간에서 작은 날개를,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나를 향해 펼치려 하는가. AI가 진화한다느니, 상상도 진화한다느니, 진화가 아니라 발전한다느니, 또한 그 발전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느니, 뭐 그렇게 확인하면서 내 행복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내 몸을 파닥거리고 있는가. 첨단 문명과 가까운 단어 사용만이 새로운 세상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라며, 나는 내 그 무엇인가의 깃발을 컴퓨터 곳곳마다 꽂으려 하는가. 그렇게 내 것으로 먼저 만들려 했다는 우월감에 흠뻑 취해 뭘 어쩌자는 걸까.

아마도 현실 도피의 한 수단이리라. 내 상황이 뭐 SF니 진화니 AI니 하며 따뜻한 고민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당장 남은 날 어떻게 먹고 자야 하는가와 팔씨름해야 할 텐데. 이제 컴퓨터 단어 놀이에 지쳐, 몸 구석 삐꺽 혹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고 들으며, 내 힘이 조금씩 아니 듬성듬성 빠지는 것을 느낄 때도 되었을 텐데. 그런데도 내 것 같은 단어를 쥐고 어떻게 밥그릇을 꼭꼭 잡고 있을까 고민하는 지금 내 모습이라니. 발목 잡고 뛰어다니려 하다니.

그랬다. 내 모습 하나 곧곧이 세우는데 쩔쩔매며, 수없이 널려져 있는 시골길 잡돌만큼 널부러진 그 어떤 컴퓨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 안에 새 단어를 넣고, 더 새롭다며 넣은 단어를 끄집어내며 즐거워하는 것일까. 그래, 그냥 컴퓨터는 밥숟가락이나 자전거나 뭐 그런 물건일 뿐이다. 그저 컴퓨터를 이용하니 편리한 것뿐. 그래서 편리함을 더 편리하게, 또 돈 되는 것을 더 돈 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일 뿐. 그 사이 서로 욕심 붙잡고 힘겨루기하는 것일 뿐. 그런데도, 나는 새 문명으로 먼저 몸을 돌리고 있다는 증거로서 그 뻔한 단어를 억지로 만들고 싶은 것일까.

◆누가 만든 단어와 영상으로 사는 나
돈 세는 사람을 수없이 거느린 사람들, 그들은 서로 좋아하는 단어 몇 개 단어만 사용하고 살 것 같다. 왜? 먹고 사는 걱정이 없으니 그럴 것. 아니 걱정이 있다면, 자신들이 사용해야 할 단어 선정이다. 원치 않은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놀게 하고 싶기 때문. 그들은, 과학이 급속히 발달할수록, 새 단어 만드는 사람들을 그들이 미리 정하고 싶을 거다. 그래야 새 단어 등장으로 인한 걱정이 아예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새 팬데믹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기가 재미있을 것. 당연지사, 나같은 엉뚱한 단어를 만드는 사람을 줄이고 싶을 테니 그렇다.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처럼, 나 또한 선택권이 없는, 어떤 단어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점점 폐쇄된 인간이 되어가는 듯하다. 갈수록 할 일이 없어지니, 그들이 연출하는 대로 손짓 발짓 모두 할 수밖에.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돈과 사랑과 건강 뭐 그런 단어들이 무한대의 경우를 만든다 해도, 내가 내 욕심을 조절하려 노력하는 한 문제가 될 건 없으리라. 문제는 내 것은 내가 잘 알기에 잘 조절할 것이라 착각이다. 참으로, 어떤 상대도 없는, 치사한 나 혼자 변명이다. 모르는 단어나 잊은 단어는 컴퓨터라는 마술의 상자에 넣고 아무 때나 끄집어낼 적, 내가 원하는 단어가 아닌 그들이 바라는 단어로 탈색되어 손에 쥐어지니 그렇다. 시간이 지날수록 AI라는 마술의 상자는, 점점 집 곳곳 웅크리고, 나를 쳐다볼 것이 분명하다. 

‘컴퓨터 문명’이 ‘AI 문명’으로, 그리고 ‘AI인간 문명’으로, 그 다음 ‘그 어떤 새 문명’으로 바뀔 것. 그럴수록, 할 말이나 할 일은 더 단순해질 듯. 그래, 행복도 단순해질 듯. 지금도 그렇지만, 먼 훗날에도, 하릴없이 다른 사람이 만든 영상, 그래 다른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행복의 하나라 믿고 싶으니까. 아마도 그때는 오고 가는 단어들에 익숙해져, ‘이것은 내 행복, 저것은 네 행복’이라는 구분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저 행복이라는 막연함에 놀아난 채, 같은 높이 같은 음색으로, 주어진 팻말의 단어를 들고 흔들며 웃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웃는 모두는 서로 서로의 광대가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그러하다. 분명 누가 만든 영상을 보는 날이 많아지는 요즘이니.

◆자연이 ‘천국’이라는 단어 욕심
전원이든 통신이든, 컴퓨터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제힘을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 존재할 즈음, 어쩌면, 인간은 컴퓨터 눈치를 보아가며 살지도 모른다. 그래, 그쯤이면 컴퓨터는 기계가 아니다. 이젠, 사람이 닮고 싶은 생명체다. 그 컴퓨터에게 어떤 힘을 빌려 쓰는 시대, 그 시대는 드디어 세상 만물과 인간이 평등할지도 모른다. 인간 욕심이 더 팽창하지 않으니, 인간은 어떤 생물과도 다투지 않으니, 유토피아 시대, 맞을 거다. 그 시대엔 천국이 이웃집 같을 거다. 자유란 단어가 점점 생소해지며.

분명, 컴퓨터는 인간을 위해 최고로 발달할 것이기에, 인류가 만족할 즈음 컴퓨터 문명이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까. 혹여 그 어떤 문명이라도, 더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지금 심정도 자연의 법칙이라는 상상이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누구라도 서로 먼저 잘 존재하고 싶은 것, 뭐 그러한 심술 보따리로 항상 꽉 채워져 있으니. 나 또한 그야말로 ‘언제나 행복’하고 싶기 때문일 것. 물론, 내 차례는 없지만. 

영화 <크리에이터> 속의 단어를 쓱 만지다가, 휴머노이드 ‘알피’와 주인공 ‘조슈아’가 나누는 대화 장면이 몸에 걸렸다. 괜한 욕심이 나서, ‘나’도 크리에이터 흉내를 내어 그 장면에 끼어들었다. 

알피 : 천국이 뭐예요?
조슈아 : 하늘에 있는 평화로운 곳이야.
알피 : 아저씨도 천국에 가요?
조슈아 : 아니.
알피 : 왜요?
조슈아 : 천국은 착한 사람만 가는 곳이니까.
(중략)
알피 : 우린 똑같아요. 나도 천국에 못 가요. 아저씨는 착하지 않고, 난 인간이 아니니까.
나 : 너도 나처럼 자연의 하나야. 이 자연이 곧 천국이란다. 우린 이미 천국에 있는 거야.

하, 언뜻 보이는 하늘이 참 예쁘다. 그래 하늘 보는 일, 천국이든 저 자연을 향하는 일은 내 유일한 자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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