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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컴퓨터 속에서도 행복해지는 나의 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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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컴퓨터 속에서도 행복해지는 나의 요령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3.08.2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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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비 김봉길 이사

컴퓨터 문명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점점, 할 일을 컴퓨터가 대신할 것.
하릴없이 더욱 단순해져 가는 나는
저 누구의 컴퓨터 속에서라도
나만의 놀거리를 만들어야 할 것.

◆30년 만에 다시 읽는 ‘시낭송바이러스’
지난 2022년 4월 둘째 일요일, 서울 시청 앞 덕수궁에선 있었던 일이었다. 초저녁부터 지하철 1호선 시청역 1번 출구부터 덕수궁 돌담을 따라 너나없이 줄을 서고 있었다. 나도 입장권을 치켜들고 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서다가 대한문 안으로 간신히 발을 들여놓았다.

나무며 별들 그늘을 피해 하늘이 잘 보이도록 자리를 잡고 풀밭에 앉았다. 구름에서 들리는 듯,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비디오카메라를 꺼내 설치했다. 이미 공중에서는 입체영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번 입체영상을 비디오에 있는 ‘광결정기억소자’에 담아 시험해보곤, 편히 앉아 현대미술관 앞의 분수대가 연출하는 물꽃춤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자 입체영상으론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가 낭송되고 있다. 중간엔 시와 어우러진 입체영상이 한 개인의 좋았던 일 슬펐던 일 등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내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며 얼굴이 서서히 나타나고…….

그 친구는 국내 최고의 컴퓨터통신 회사에 30년째 있었는데, 10년 가까이 소식이 없길래 왠가 했더니, 낭송 공연을 위한 한 기획 모임에 참여해 산이며 방송국을 마구 뛰어다녔다며 시낭송 공연 안내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평소 얌전히 직장과 집만 오가던 친구가 이렇게 된 것은 ‘사회 전반에 일고 있는 여가 선용의 일환으로 생활의 양태가 변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꼭 한번 오란 말과 함께 털어놓은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정년퇴직을 5년 남긴 시점이었으니, 예순살 살을 넘기던 2017년 겨울이었다고 했다. 보통은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고 4일은 휴식 겸 재택근무를 하면 되는데, 이 친구는 보름 간격으로 출근 혹은 재택 근무하는 직장이었다. 그날은 재택근무 날이라 사무실을 겸해 사용하는 방에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시스템의 본체를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본사와 통신을 하는 순간 갑자기 음성인식과 관련된 장치를 제외하곤 동작이 모두 멈추어 버리더란 것이었다.

이어 화면엔 <1992.4 시낭송바이러스>란 내용과 함께 “지금부터 낭송되는 시 만큼 자연스럽게 48시간 이내에 시낭송을 들려주지 못하면 당신과 연결된 모든 컴퓨터의 자료가 모두 지워짐. 준비가 되었으면 크게 손뼉을 치시오.”란 경고 메시지가 연속해서 나타나더란 것이었다. 친구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본사에 이 사실을 알렸더니, 즉시 동작을 멈추라는 지시가 있었다. 두 시간도 못 되어 본사 ‘컴퓨터바이러스퇴치연구소’ 연구원 몇 명과 ‘컴퓨터바이러스퇴치협의회’의 전문가 그룹이 도착했다. 한참 토론 끝에 우선 그 시를 들어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손뼉을 크게 치자 시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시를 읊고 있었다. 시는 자연을 예찬한 내용이었는데, 낭송이 끝나자마자 친구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마음의 박수가 저절로 나오더란 것이었다. 그 박수 소리와 동시에 같은 시가 되풀이되어 들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시낭송 관련 단체가 온 것은 다음 날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시를 듣더니 “이 여자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에 요절한 낭송 전문가였다.”라고 말하며,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동료를 여럿 알고 있으니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예술인자료은행’을 조회한 결과 그 사람의 거주지가 남해안 모처로 확인되었다.

그 원로 낭송가의 시가 입력된 것은 제한 시간 30분을 남겨둔 긴박한 상황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단말기가 되살아나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세상 공기와 차단된 방에서 가상현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하다 보니 아내의 죽음을 몰랐다. 30년 후면 이 가상현실시스템들이 인간 환경 자체를 바꾸어 버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러한 첨단 과학이 대신하지 않으리라 믿어진다. 나는 그 경종을 위해, 이 ‘시낭송바이러스’ 제작을 끝으로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며칠 후, 세계순회시낭송공연을 위해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다가 김포로를 따라 혼자 걸었다. 점심 먹을 시간을 잃고, 저녁 어스름을 맞으며 실컷 유행가를 부르고, 또 친구가 낭송한 시를 보며 크게 읽다가 외우다가 내 노래라 만들어 부른 날, 그날 가족과 함께 먹은 저녁밥은 생애 최고의 만찬이었다. 
(‘시낭송바이러스’ 전문, 월간에세이 1992년 4월호)

◆섣부른 상상이 부른 오류가 즐겁다
시낭송바이러스, 그 색바랜 월간지의 글을 컴퓨터에 입력하며, 다시 자세히 읽었다. 내겐 참 오래된 세월이다. 몸을 담고 있었던 연구소 전체가 서울 에서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해 대전엑스포 모아드림 전산시스템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며 틈틈이 시를 발표하고, 나아가 ‘대전젊은예술인들의모임’을 결성해 대전 중심가 몇 곳에서 시낭송 공연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제목을 ‘시낭송바이러스’라고 단 것은 내 딴에 시낭송도 삶을 즐기는 하나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는 엉뚱한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발표한 글 내용 중,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섣부른, 30여년 전의 당시 상상은 결국 빗나갔다. 2022년 봄이 지나도 덕수궁 공중엔 높이나 크기가 수백 미터급의 입체영상이 올라가지 않았고, 스피커 없는 음파공명증폭장치에 의한 음향시스템도 개발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글 속의 인공지능 시낭송바이러스도 제작되지 않았다. 또한 가상현실시스템 또한 메타버스라는 이름을 달고 땅따먹기 놀이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으니, 당시 내 상상의 그릇이 얼마나 작았던지,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물론 변명이지만, 인간 모두의 상상이 그때마다 실현되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그 기적 같은 일은 반드시 기적으로 일어나고야 만다. 수없이 반복되는 상상의 오류 속에서, 한꺼번이 아니라 천천히, 여러 현상이 겹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았던 일이 나타나고야 만다는 것. 나에겐 먼 이야기지만.

21세기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요즈음, 블록체인이니 생성형 인공지능챗봇이니 하는 말들이 일상어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저마다 더 좋은 존재 유지와 그 전달을 위해, 자신만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새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렇게 서로 자신의 생태계 조성을 위해 치열한 새 판 짜기가 20세기 중반부터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 새 판 짜기라는 말은 과거 ‘컴퓨터 이전 판’과 작금의 ‘컴퓨터 이후 판’은 상대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지난 일이지만, 새 판 짜기에 있어, 필자가 시낭송바이러스 원고를 쓰는 대신 프로그래머로서 시낭송바이러스 퇴치프로그램을 짰다면? 그래서 그 프로그램으로 돈을 벌었다면? 물론, 기적에 조금 가까웠었겠지만, 행복감은 멀어졌을 것. 물론 시낭송바이러스 같은 원고를 쓰고 싶은 이유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먼 그때의 지금은, 반드시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느낌을 내 미소로 만들고 있어야 하리라는 고집 때문이었으리라. 이렇듯, 어떤 이유든, 나는 계속 행복해야 한다고 하니, 난 세상에 없는 욕심꾸러기인가보다.

◆컴퓨터와 가치는 서로 상관없다
자, 그래도, 기왕에 행복해지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다 비슷하다고 쓰고 싶으니, 나의 경우 어떻게 하면, 10년 후든 그 이상이든, 행복한 내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과연 어떨까? 뭐 그때 어떤 모양새로 존재할지 모르겠으나, 억지라도 그때를 상상해보려는 것은 내 행동 하나라도 지금보다 좀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물론, 청소년 시절이나 지금이나 또 다음 언제 즈음이거나, 그때마다 행복은 달랐고 또 다를 것. 그런데도, 끝까지 행복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살아있으려 하다니. 그래, 내 욕망의 끝은 가늠할 수 없다. 어떤 내 변명도 그저 반 토막 난 1원짜리 동전만도 못한 듯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러한 나를 느끼면서도, 누구나 바라는 바가 있기에 존재한다는 말, 그것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라는 말, 이 말을 얼마나 스스로 반복해 강조해야 나는 내가 내 마음에 들 수 있겠느냐는 거다. 그렇게 언제라도 마음에 드는 나를 확인하며 천천히 지금을 즐기며 웃을 수 있겠느냐는 거다. 하, 꼭, 그래야만 할까. 굳이 끝까지 고집 피울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쌓아온 가치가 그 어떤 의미가 있다고 이렇듯 우기는 것이었다. 컴퓨터 이전 시대든 먼 미래든, 또 그 누구든 나 같은 이는 흔할 거라고 우기며.

어림잡아 몇천 년 동안 그 많은 사람이 누렸던 그들만의 어떤 가치와, 또 지구에 땅을 딛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사람들의 가치란 어쩌면, 모두 도토리 키재기일는지 모른다. 누구나 나만의 것이라 믿고 있는 그 어떤 가치든, 어쩌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요, 또 그 많은 사람이 생각하게 될 가치라는 것에 대해, 내가 어찌 이렇다 저렇다 훈수를 둘 수 있겠느냐는 것. 내가 아무리 지금 성찰 곱하기 반성을 몇 밤을 새우며 반복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조금씩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맞다, 바이오컴퓨터가 인간 세포와 동기화될 즈음, 그 기술이나 그 이론이 등장한다 한들 그 어떤 행복과 상관있겠느냐는 것. 내가 컴퓨터인지 컴퓨터가 나인지 오락가락하는 날, 그 뉘라서 소리치며, 자 나는 이러하니 보시라 만져보시라며 가슴이든 얼굴이든 불쑥 내밀겠느냐는 것. 혼자든 누가 있든 하하거리는 일이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하리라며, 마지막 숨을 쉬면서라도 외칠 수 있겠느냐는 것. 나는 지금도, 그 어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끔 오류투성이 그러한 내 시간이 가슴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 막연한 어떤 일을 할 수밖에. 아니, 어쩌면 그 어떤 일을 억지로 만들고 있을 듯. 이렇듯 어떤 글자를 이으면서라도, 나를 늘어놓고 보고 싶은 것이었다.

◆컴퓨터 속에 들어가 할 일이란?
메타버스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며칠 살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살아가게 될 날이 가까워질수록, 그때를 상상하면, 그때 내 삶은 지금보다 더 단순질 것 같다. 내가 나의 아바타가 되어 가상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갑자기 툭 떨어지거나, 탁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서 먹고 걷는 일상이라니, 이 얼마나 단조로운 행동을 할 것인가. 

물론, 가상세계 그때의 나는 그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빈둥빈둥 어슬렁거리며 살게 될 것. 기계들이 모든 사람 대신 일을 해주는 날이 오고야 말 테니, 그래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에 대해 미리 걱정해 보는 일, 누가 알겠는가, 지금 뭐라고도 적어 두면 누구라도 노는 데 도움이 될지.

하, 그런데, 적을 게 별로 없다. 컴퓨터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막막하다. 살고 죽는 일이 싱거워지는 시대, 그때를 살아가는 일이 고작 놀고먹는 일이라니. 그렇다면,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나만의 그 놀거리를 가져야 하리라는 거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나는 나만의 사례를 남기기 위해 살았던 것 같다. 나는 그 누구와는 조금 다른 나를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나를 느끼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몰입하려 애썼던 모양이다. 자, 그러니, 내 남은 날들도 내가 만나는 이들 또한 나 중심으로 움직여주길 바라며 내 시간 만들지에 몰입할 수밖에. 혹시, 몰입하는 일이 단순할수록, 그래서 더 몰입할수록 내 모습이 조금은 더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어쩌면, 저 먼 미래 세상이 되어 컴퓨터 속을 들락거리며 살더라도, 끝까지 컴퓨터란 내 행복을 위해 필요한 구두나 밥그릇 같은 도구로 취급해야 하리라. 컴퓨터 겉으로 나왔을 때, 누구든 자신만의 시간이 존재했음을 만끽하기 위해.

예를 들어, 시낭송바이러스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아름다운 시낭송 작품을 남기다가 요절한 시낭송가나,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아내가 죽은 사실도 몰랐던 프로그래머는 어쩌면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새로운 사람들에게 시를 들려주는 취미로 세계 공연을 순회하는 친구나, 시낭송 작품을 나만의 노래로 그때그때 만들어 부르는 ‘나’ 등등은 그 나름의 즐거움을 느끼는 일에 몰입했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그 즐거움의 우열 없이.

◆컴퓨터 속에서도 행복해지는 나의 요령
가끔,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산이나 물이나 하늘을 볼 때가 있었다. 또, 그러기 위해, 새로운 곳과 마주하기 위해, 나를 새롭게 하는 일을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난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책이나 영화에 몰입해 다른 세상을 잊고 몰입한 때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사람마다 그 즐거움은 다르겠지만, 그 어떤 경우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심취하려 몰입하곤 했다. 그 나만의 사례가 새로운 것이라 느끼면서, 나를 그 속에 몰아넣고 그것이 즐거운 시간이라며, 입 굳게 다물고 속으로 고개 크게 끄덕이곤 했다. 오랫동안 컴퓨터 속에 있다가 나온다 해도, 나만의 사례를 끝까지 쥐고 싶다며.

이제 다시 30년 후를 생각해 어떤 상상의 글을 쓰라는 청탁을 받았다면? 우선, 머뭇거리며 원고 마감 마지막 날까지 하늘만 쳐다볼지 모른다. 어떤 상상을 해도 틀릴 거니까. 아마 몇 시간 남기고 박박 써댈 것. 쓰기 위해 더 살고 싶다며, 이는 욕심이 아니라며, 나만의 지금 행복이라며 마무리할 거다. 지금이든 머나먼 미래든, 결국 행동이든 생각이든, 나는 단순 명료해질수록 행복한 웃음소리를 스스로 내고 들을 거다. 그때마다, 내 소리 확인할 거다. 처음 보는 나를 위한 글의 그 맛에 취해 읽는 일, 꽤 괜찮을 듯. 이도 아니면? 아, 심심해 어떻게 살아 내겠는가! 

먼 훗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나 자신만의 단순한 일을 컴퓨터 속에서도 가진다면? 아마 분명 그렇게 되겠지만, 그땐 서로 다투는 일이 없어질 것 같다. 첨단 문명이 거듭되어 지금 인간 모습이 만화 속 주인공처럼 서로 다르게 단순명료해지고,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해질 테니. 나만의 아바타 모양을 만들어 가며 알콩달콩 웃을 테니. 서로 단순해지고 싶어, 컴퓨터 밖에서도 먼저 어떤 욕심이든 땅에 버리려 할 테니. 

info@blockchai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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