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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나의 아바타를 위한 심심풀이 땅콩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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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나의 아바타를 위한 심심풀이 땅콩 몇 개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4.01.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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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비 김봉길 이사

컴퓨터가 발달할수록 혼자 노는가? 그렇다.
혼자 놀수록 더욱 심심해지는가? 그렇다.
심심할수록 내가 더 잘 보이는가? 모른다. 
나를 잘 볼수록 허허 즐거워지는가? 모른다.
언젠가 컴퓨터는 나와 같아지는가? 그렇다.

◆현재와 미래가 묶이는 컴퓨터 문명
한때, 내 직업은 프로그래머였다. 나와 같은 나이의 빌 게이츠가 DOS를 탑재한 8비트 PC도 만졌다. 비슷한 시기에 ‘사이버’라는 말이 소설 <뉴로멘서>를 통해 알려져 ‘컴퓨터문화’라는 새 단어가 등장했다. PC가 전 세계에 동시에 사용될 무렵, ‘메타버스’와 ‘아바타’라는 말들이 소설 <스노우 크래시>를 통해 내게 다가왔다.

한편, 컴퓨터를 연결하는 통신이 발전하면서, 핵무기 위협으로 초대형컴퓨터의 데이터를 여러 지역에 분산 보관해야 한다는 절대성은 인터넷을 탄생시킨다. 결국, 컴퓨터와 그 인터넷은 인류가 활용한 불, 칼, 바퀴, 전기 등에 이은 생존 최고 수단이 되었다. 특히 스마트폰은 새로운 사회 혁명의 방향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즉, 인간 정보가 곧 재산이요 무기가 되는 컴퓨터문명 시대로 접어든 것.

당연한 결과지만, 이 거대한 변혁의 수단인 컴퓨터는 ‘특별한 개인들’의 권력 도구가 된다. 물론, ‘나머지 개인들’은 그 도구의 대상이다. 그 대상으로서의 나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의해 가공된 정보 묶음의 하나일 것. 나도 모르게 로봇 혹은 ‘휴머노이드’에 이은 나와 같은 ‘아바타’로 인해 내가 이원화된 채, ‘메타버스’라는 사이버공간과 지금 현실을 넘나드는 상품으로 전락하리란 우려는 나만이 아닐 듯하다. 

더 큰 우려는 이러한 변화가 너무 빠르다는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컴퓨터 독점시대 아니 ‘컴퓨터 독재시대’가 되는 듯하더니, 먼저 살아남기에 급급한 이들의 행보는 블록체인 해시값이나 무한대 인공지능 생존 노드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서로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 결과, 지역이니 사상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이 뒤섞이는 저 가상세계에선, 앞뒤와 옆을 볼 틈 없이 사라질 것. 현재와 미래라는 개념이 하나로 묶이는 착각이 순간마다 생기니 더욱 그렇다.

◆컴퓨터도 나만큼 생존욕구가 있을까?
이렇듯, 급변하는 컴퓨터 문명을 형성해 가고 있는 사이버 세계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새로운 가상세계의 현실화를 어떤 이유든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에서, 지금부터라도 나의 정체성 변화를 스스로 일으켜야 한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컴퓨터 사용 40년이 내게 미친 영향은 크다. 사이버나 아바타라는 용어가 내 몸과 마음과 어떤 관련이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를 어떤 경험으로 확인하고, 이에 대한 근거를 과연 어떻게 남겨야 할까? 이러한 고민을 미리 해두려는 것은 남은 내 생애에 단 하나라도 명쾌한 답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서다. 또한, 삶이란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반복이라는 핑계이기도 하다. 

아직 메타버스 세계가 내 혈관이나 신경에 접속되려면 수백 년이란 기간이 남아있으리라는 막연함이다. 이러한 막연함은 밥 먹거나 화장실 갈 때마다 잊는데도, 하필 나만이라도 그 과정이나마 남겨두고 싶은 것은 왜일까? 뭐, 이런저런 상상 혹은 쓸데없이 고민하는 것? 그래, 어쩌면 인간은 현실을 벗어나 뭔가 다른 것과 관련성 맺기를 통해 생존해 있음을 느끼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단순함 때문일 듯.

그래, 뭐 그럴 거다. 나도 미리 사이버 속에서 활동하는 아바타가 나와 함께 자고 먹으며 함께 있음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거다. 이유는 없다. 이러한 상상의 대리만족은 머지않아 취미 내지는 생활 수단의 하나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혹여, 그 어떤 인간이 그의 아바타와 함께 있게 될 때, 내가 느꼈던 것을 따라 할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 무한대 같은 경우의 수 중 하나겠으나, 당사자에게는 어떤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동기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어떤 컴퓨터가 아니 어떤 아바타가, 나도 살고 싶다며, 나도 생명체와 같아지고 싶다며, 기본적인 생존 욕구라며, 인간처럼 스스로 행동하게 될 때는? 내가 만일 그 앞에 있다면, 내 앞에 있는 대상에게 어떤 느낌을 주어야 할까. 어떤 방법으로 준 느낌에 대한 그 반응을 사랑이나 행복이니 하는 이름으로 느낄 수 있을까. 분명 그렇게 해야 그때의 나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 그렇다. 

어떻게? 그래, 당연히 지금 인간 대하듯 해야 할 거다. 그래야 할 거다. 그도 자연물의 하나라고 말해야 할 거다. 지구에 우주에 존재하는 것 모두 자연물일 테니,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이든 자연물이어야 하니 그렇다.

◆컴퓨터도 사람처럼 순간마다 멈춘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다. 인류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움을 위해, 독백하듯, 가르치듯, 서로 되뇌어 온 말이다. 지금도 나는, 내가 겪었던 것들에 의해, 그것만이 나를 편하게 한다며, 마음과 몸이 서로를 붙들고 끙끙대곤 한다. 그 뉘처럼, 나 또한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그 무엇에 달랑달랑 매달려 왔기에 다른 만족은 끝내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유일 거다. 

그러니, 할 일 없어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가끔 내 안에 고여있는 게 또 무엇일까 하고, 내 그것을 만지려 했다. 보이는 것 그 무엇이라도, 그 무엇과 내가 같아지길 바라며, 잔뜩 노려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있구나!’ 하는 바늘구멍 같은 표시를 만들고, 그 옆에 더 작은 바늘구멍일망정 또 다르게 표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웃고 화내던 내 지난날들이다. 돌아보면, 참 행복한 날들이 있었다. 

아, 그러나, 아무리 눈 감고 감아 그리워해도 지난날일 뿐이다. 지금도 눈 뜨다가 감다가 뭐 그러다 보면, 다시 할 일 없이 코앞에서 숨 쉬고 있는 내가 있는데, 문득 어떤 향기도 나지도 않는데, 나는 내 안에서 사라지려는 내 향기를 끝까지 느끼려 하는 것이었다. 하, 뭐 그러다 결국, 내 향기가 저쪽에 어디 있나 하며 밖을 기웃거리곤 한다. 그래, 저게 메타버스 세상인가, 거기서 꼬물거리는 게 내 아바타인가, 눈 내리고 또 녹고 하는 자연 현상의 하나인가, 뭐 이래저래 혼자 묻고 대답하면서 말이다.

묻고 답하는 일이 생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라 한다면, 묻고 대답하는 그 사이마다, 그 순간마다, 나는 항상 대기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컴퓨터도 나처럼 대기 상태에 있다. 어쩌면 멈춘 상태 그 자체도 어떤 행동의 하나다. 멈춰 다음을 펼쳐 보는 일, 다음에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도 곧 대기 상태. 그렇다면, 인간이나 아바타는 다음 순간을 위한 잠깐 멈춤에 있을 때, 그 짧은 상태에 있을 때, 그저 숨 쉬는 것을 느끼거나,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특별히 떠오르는 느낌을 확인하거나, 뭐 그러면서 있게 되는 걸까?

아마도, 멈춘 순간마다 다음 생존과 관련된 욕구가 몸에 마음에 꽉 차 있을 것은 분명하다. 나부터 생존해야만 한다는 것, 이 본능을 감싸고 도는 것은 욕구 말이다. 인간 누구나, 내가 앞서야 하고, 많이 가져야 하고, 내가 먼저 명령하고, 누구보다 더 기분 좋은 상태에 있어야 하는, 뭐 이런 것을 끊임없이 확인한다고 한다, 뭐, 나도 그렇다.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 생명체의 이 끊임없는 욕구는 자연 현상의 하나니까. 인간은 움직이지 않으면 심심해지니까. 심심하면 다른 상상의 꼬리가 그냥 있지 않으니까. 

◆컴퓨터와 나를 위한 심심풀이 
가만히 있을수록, 심심할수록,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을 만들어 내는 요즈음이다. 언제나 그러했거니와, 나 또한 가끔, 지난 회한의 날을 되돌아봄에, 막연한 백지 같은 공백 상태를 느끼곤 한다. 순간 교차 되는 이러저러한 감정들이 서로 섞여 멍청해지고 싶은 것.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나이가 들었고,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고, 그 일마다 어떤 매듭 매듭의 시간이 산뜻해지리라 믿어보곤 한다. 뭐 컴퓨터 앞이든 아니든 그 어떤 심심함을 자연으로 되돌리기 위함이라는 것, 참 멋진 핑계다.

그러나, 반성 혹은 성찰이니 하는 것을 던져버리고, 한번은 심심할 때마다 원래 심심할 때가 있는 거야, 심심한 것도 사는 과정의 하나야 하며, 그 심심함을 견디어보는 일은 어떨까. 견디고 견디다 보면, 내 모습을 더 들여다보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하얀 아니면 검은, 또 아니면 빨간 파란 노란, 뭐 그런 시간이 지나고, 그 모두 하나가 되어 쉬 지날수록, 무엇을 견디는 일에서 자유로워질 때가 있다고 하니 그렇다. 지금 순간보다 조금은 편해지는 순간이 있으리라 믿어보자는 것, 그래서, 마음속으로든 밖으로든 편히 흘러가는 구름을 한 번 더 보자는 것이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무한대의 반복을 통해 터득하려는 것, 즉 심심한 것과 편한 것이 같아지는 순간, 무한대의 하나인 그 한순간의 느낌을, 그 나만의 느낌을 한번 건드려 보려는 것 아닐까. 그러면, 어느 순간, 문득 나 자신을 확인해 보는 우스꽝스러운 시간이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인 듯도 하고, 그런 시간이 내 것 아닌 듯도 하여, 슬프게 웃을 때도 생길지 모른다. 아니 슬프지도 우습지도 않아, 그게 뭐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느냐, 피식거리고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럴 땐, 그저 흐르는 저 바람도 이 빛도 내 시간인가 하여 바라보는 수밖에. 그사이 내가 그 무엇이구나 하며 움직일 수밖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고야 싶지만, 어찌 내가 나인가 하고 속삭여 불러보다가, 바로 나로구나 크게 소리칠 수 있겠느냐는 거다. 그러니, 심심하게 지나는 내 시간이거나, 그게 나이거나, 내 몸이거나, 아니면 내 마음인가 하여 손끝 한 번 움직여 보는 수밖에. 지금의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나만의 심심함 유지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으리라. 심심한 벼랑길에 한 손가락으로 매달려도 더 심심한, 그런 다음의 다음, 그다음 더 심심한 순간, 그 매달렸던 손가락으로 내 몸도 내 마음인가 하여 만져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나도 살아있다는 증거로 누군가가 나를 톡 건드려 주었으면 하는 때가 있었다. 그래, 다시 새로이 심심해지길 바라며! 하하, 언젠가 내 아바타도 이런저런 말을 어떻게 다르게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하하, 나를 따라 할까?

◆나 혹은 아바타의 ‘심심풀이 오후 잡담’
한 20년 전, 점심 먹고 심심풀이 땅콩 몇 개 먹듯, ‘오후 잡담’을 한 적이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다가 졸다가 멍청히 있다가, 툭툭 컴퓨터를 건들며, 아니 나를 건들며, 그렇게 혼자 잡담을 늘어놓았던 것. 그런데, 먼 훗날 어느 오후에, 그 어떤 아바타가 그 누구에게 잡담하려 한다면, 다음의 내 ‘심심풀이 오후 잡담’과 비슷하게 중얼거릴 수도 있으리라.

“뙤약볕 길가 가로수마다 매미 소리가 쨍쨍거리는 점심을 먹은 느긋한 오훕니다. 천천히 눈 껌뻑이며,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심심하군요. 후후, 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대면 더 좋고요. 뭐 그저 이야기하고 싶어요. 무슨 얘기냐고요? 그렇다고, 이렇다 할 건 없고요, 약 올리느냐고요? 풋, 그럴 리가 있나요. 혹시 졸린 것 같아, 이곳저곳 내 세상인 양, 한번 찔러보려는 건데요 뭐. 어디 아프냐고요? 아닙니다. 미안해요, 아픈 곳 없어, 더 미안합니다만, 뭐 그냥 말 좀 들어달라는 거죠.

음, 그러니까, 나는 어떠한가? 이런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그 뭐냐, 그러니 여기는 어딘가? 또, 또 너는 무엇이냐? 그리고 뭐 기타 등등. 하하, 행복에 겨워하는 말, 너무 시시하죠? 또 할까요? 풋, 제가 봐도 시시해요. 동그란 땅을 손에 올려 봅니다. 건방지죠, 물론. 이 땅에 서 있다가, 언제까지 사라질까 서 있다가, 조금씩 사라지는 슬픔을 보다가, 또 함께 사라지는 기쁨도 보다가, 스르르 시들어가는 손 위 동그란 땅 보다가, 그러다 더 할 일 없어 또 숨죽이죠. 사라지게, 숨 더 사라지게. 사라지는 몸과 마음 더 잘 보이게. 푸풋, 다시 배고프길 기다리죠. 아시죠? 배고파지려는 건 심심해서 그렇다는 거.

심심하면 그럴수록 가물가물 세상이 가늘어 보여요. 점심 두 숟가락 더 먹은 탓이죠. 문득 졸음 같은 것이 와요. 언제라도 다가오고 있는 나 같은 것. 거기 있구나, 또 있었구나, 그대로 두고 한 뼘 떨어져 바라볼 수밖에요. 죽어가고 있는 것은 죽는 대로, 생겨나고 있는 것은 생기는 대로, 그냥 슬며시 한번 건드려 볼 수밖에요. 그저 나란, 내 숨이란, 그중 하나일 뿐. 가지고 있는 것은 내 몸뚱어리 하나일 뿐. 마지막 갈 때는 이 또한 훌훌 털고 갈 뿐이라며.

언제 또 그랬듯, 어떤 배부른 오후가 되면, 바라보거나 건드리지 말고, 더러는 만져야 할까 봐요. 만지며 쿡쿡 입 벌려 뭐라도 중얼거려야 할까 봐요. 귀 막아도 흘러가는 바람결. 눈 감아도 흔들리는 물결. 멋으로 산다는 것은, 그 사이마다 번뜩이는 살랑 찰랑 나 같은 빛 만지는 일. 빛 따라 춤추는 내 시간 보는 일.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라도 만져야 살아있는 거라며.

나 같은 나를 만지다가 또 쿡쿡 웃어야 할 때도 있겠지요. 뭐가 부끄럼인지 멍청함인지 모를 때요. 지금이라고요? 그래요. 배부른 거 하나 지키고 있는 지금, 더 심심해지고 싶은 지금, 맞아요. 그냥 나는 지금이지요. 언제 다시 나를 만지고 껴안을지 모르니, 이렇게, 계속 지금이라 우기는 거죠. 행복 같은 거 다음엔, 지금처럼 모두 심심해지는 거라고.

그래요, 다시 점심 먹게 될 오후가 있을까요? 누굴 기다려야 할지요. 그땐 더 심심하지 않았으면 해요. 점심 잘 먹었냐는 거 묻지 않기를 바래요. 할 말이 더 없어지거든요. 그냥 보면 되니까요. 

허, 내일부터, 점심 먹지 말까요? 먹지 말고 계속 묻기만 할까요? 아니, 저녁이 와도, 아침이 오고, 곧 점심이 또 와도, 묻기만 할까요? 매미 소리가 더 들리지 않도록, 나는 심심한가, 묻기만 할까요? 후후, 그래도, 듣는 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뭐, 이런 이야기 하고 싶다는 거죠.” 

info@blockchia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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