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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가지 않은 길’을 쳐다보는 디지털 솟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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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가지 않은 길’을 쳐다보는 디지털 솟대를 위하여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3.02.0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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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밈비 이사 / 시인

◆‘가지 않은 길’이 반이라면, 공평하다
요즘, 꿈 많은 고등학교 때 교과서를 통해 외웠던 시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 시낭송 공연으로도 명성을 날린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중략> 훗날,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그랬다. 자신이 걸어온 길과 가지 않은 길, 그 선택의 길목마다 남은 아쉬움은 누구나 있다.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대부분 선택은 거의 본능적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은 몇 개 선택은 큰 추억거리를 만든다. 그런데 삶의 미련인가 아니 욕심인가, 중년이 지나는 지금, 아직 더 중요한 선택할 일이 있다고 느껴지니, 참 우습기까지 한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무척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랬다. 그 선택으로 무엇인가 즐거움이 생기리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 이 확신이 매일 아침 잠자리를 힘차게 박차고 일어나게 한다. 할 일을 만들고, 그 일을 하고, 그 속에 있는 나를 확인하는 것, 분명 큰 즐거움이다. 물론 새로운 즐거움.

자나 깨나 스마트폰을 팔길이 안에 두어야 마음 편안해지는 내 습관은 어느새 사회 관습이 되어가고 있다. 나의 최근 선택은, 이러한 관습을 넘어 이제 일상 용어가 된 컴퓨터 문명의 급변하는 변화를, 지금처럼, 기록으로 남겨 보는 일이었다. 그 추적의 괘도를 에세이로 쓰는 일인데, 가까운 이웃이 이 글을 조금 참고했다가 컴퓨터로 인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황에 잘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다. 

아마 <가지 않은 길>처럼, 나이가 더 들어 컴퓨터 앞에 1시간이라도 앉지 못할 즈음, 혹여 그 시기마다 의미 있게 생각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면, 그 아쉬움으로 한숨 쉬는 날이 많아질 테니 말이다. 나에게는 가지 않은 길이 있었기에, 지금은 가지 않을 길을 상상으로나마 가봄으로써 한숨보다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고 싶은 것. 물론, 결과적으로, 상상은 상상의 길로 이어지기에, 또 다른 가지 않은 길을 또 다른 아쉬움과 함께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내가 컴퓨터 직업을 택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컴퓨터 문명의 징검다리가 되어 그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내가 무엇을 선택했든, 지금 내 행복 지키기와는 상관이 없어야 하리라. 그래야 후회하지 않고, 남은 삶을 더 즐거워하리라. 그런데도 가끔 욕심을 부리는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이 곧 행복한 길이 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아마 누구나 ‘다 그런 거야~ 뭐 그런 거야~’라며 말이다. 

뭐라 할 수 없다, 누구나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행복하게 생각하는지 묻고, 또 스스로 답을 해보게 된다. 가끔 답 찾는 이런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며. ‘세상 모든 것 중, 아니 내가 선택한 것 중 반은 좋다.’ 내 모든 시간의 반은 좋다는 뜻. 그래, 나는 반만 행복하다. ‘어떻게 봐도 맞다’라며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허, 그것참, 신기하게도 하늘도 땅도 웃는다. 참 공평하다며. <가지 않은 길>이란 언제나 있었고, 또 생길 것이라며 웃는 것이었다.

◆짧아진 세상 특이점 현주소 찾기
또 엉뚱한 상상이긴 하지만, 혹여 저 먼 컴퓨터문명 속에서 살게 될 때도, 뭐든 내가 선택하고, 질문도 답도 내가 할 수 있을까? 선뜻 대답이 안 나온다. 향후, 내 몸과 마음이 분리될지도 모르는 저 상상의 디지털시대에서는 내가 원하는 절반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겠느냐는 거다. 과연 컴퓨터특이점을 넘어선 저 시대에서도 행복은 존재하기나 할까? 행복도 숫자로 표기하는 시대, 생각도 숫자, 웃음도 숫자로 나타내는 시대일 텐데, 그 긴 숫자로 표현될 수도 있을 텐데, 나의 그 숫자 끝까지 내가 쳐다볼 수나 있을까?

보통, 사회의 새로운 국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정점을 특이점이라고 한다. 그 정점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라는 특이점, 지금까지 인류가 거친 그 큰 몇 개를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포유류의 조상은 설치류처럼 생긴 ‘아침이빨’이라고 한다. 공룡 틈바구니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이 포유류가 탄생하기까지 그 특이점이 수억 년에 걸쳐 일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 인간이 두 발로 걷기까지 수 천만년이 걸렸고, 그 후, 자유로이 두 발로 다니기까지 수백만이 걸렸다. 그리고, 두 손을 사용해 불의 문명을 이루기까지 수십만 년을 거치면서, 그 불꽃이 하늘을 찌를 즈음, 또 하나의 특이점이 존재했었으리라.

학교 때 익숙하기 시작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등의 특이점을 거쳐, 마차를 끌고 칼의 문명에 도달하기까지 수만 년 만에 또 다른 특이점을 지나쳐 오게 된다. 이때는 토지가 가장 큰 자산이었다. 그 후, 금이 자산으로 추가되면서, 수천 년을 지나, 산업혁명이란 특이점을 또 지나친다. 그리고, 불과 이삼백 년 만에 핵이라는 특이점을 다시 맞는다. 이렇게 근대를 거쳐 주식이나 채권이 새로운 자산군에 편입되며 20세기에 이른다. 

드디어, 집채만 한 컴퓨터를 만들고, 책상과 같은 개인용 컴퓨터 생활 수십 년 만에, 지금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면서, 새로운 자산으로 등장한 암호화폐를 사용하는 새로운 특이점의 머나먼 길을 향해 들어선다. 바로 컴퓨터시대 문명의 문고리를 잡고 막 열려고 기웃거리는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가지 않은 길>을 인간은 서로 다녀봄으로써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었으리라.

이렇게, 현대에 이르기까지, 억, 천만, 백만, 십만, 만, 천, 백, 십 단위로 그 변화의 특이점 기간이 급격히 줄었음을 언뜻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노력이 과학을 급속히 발전시켰고, 그만큼 하루가 다르게, 아니 일분일초가 다르게 지금의 우리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 변화 느끼기가 곧 행복임을 자각하기 위해, 지금 세상을 다른 높이에서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해서라도, 분명 나부터라도 내 발걸음을 <가지 않을 길>을 찾아 바꾸긴 바꾸어야 할 일이다. 

◆이미 시작된 컴퓨터문명 징후 
이러한 특이점들이 짧아질수록 인구는 증가했다. 바로,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이 인간 욕망을 증폭시켜왔기 때문일 것. 지금은 그 욕망이 갑자기 컴퓨터라는 매개체로 집중되고 있는데, 급기야는 인간이 인간을 컴퓨터 속으로 이입시키는 수준에 이른다. 아마도 양자컴퓨터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시점을 컴퓨터특이점이라 지칭할 수도 있을 것. 바로 ‘생체컴퓨터’ 시대를 관통하게 되는 것. 그때, 인간의 DNA와 연결을 시도하는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은, 컴퓨터를 컴퓨터라는 말 대신, 뭐라 뭐라 부르는 새로운 시대를 살게 될 것.

이미 시작된 컴퓨터문명을 향한 특징의 하나는 인간 정체성의 변화라 하겠다. 컴퓨터에게 명령을 내리면, 이 명령을 위임받은 컴퓨터가 인간에게 명령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자칫, 컴퓨터가 우리 인간을 능가하면 어떻게 될까? 답안을 명확하게 내리기 전에, 이러한 우려의 반복이 계속되면 될수록, 인간 정체성은 큰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컴퓨터 인공지능의 또 다른 목소리가 인간보다 더 커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쨌든, 이렇게 빠른 변화의 개인 생활 자체가 블록체인 속에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그러니,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블록체인 생활화라는 명분은 ‘인간의 24시간 컴퓨터화’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은 뻔한 일. 더 강조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 신체는 로봇화가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은 아바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가선 아바타가 인간이 되더라도, 뭐 크게, 놀랄 정도의 일은 아닐 듯.

새 문명을 향한 조금의 세월이 지나기 전, 이러한 사회 변화의 전조 현상은, 아마도, 세계 다국적기업 중심으로 세계 질서 재편으로 이어질 듯도 하다. 가면 갈수록, 경제 불균형에 따른 절대 빈곤층이 증가할 것이고, 결국, 절대 자본가들의 세계가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상상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각국 정부는 그 크기 나름대로 역할만 할 뿐이고.

자, 이러한 시대에 우리네 행복은 어떻게 변할까? 아마도 1인 생활 시대 증가로 인해, 개인 생활은 더욱 단조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즈음에는 행복의 정의도 변화를 일으킬 것. 결국, 나만의 행복론이 무성해지고, 행복 같은 행복감으로 숨을 쉬어지게 될 것. 뭐 어떻게 ‘사는 것’인지 ‘살아있는 것’인지,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는, 그래서 나는 ‘디지털 그 무엇’이다고 움직거릴지 모르는 일. 이러한 생각만으로도 그 많은 사람 각자가 느끼는 정체성 혼란은, 그 폭은, 너무 클 듯하다. 이땐 슬픔도 고통도 뭐 기쁨도 하나가 될 듯.

◆나의 디지털시대를 향한 욕심 사례
그랬다, 가끔 ‘아, 나는 지금 행복해!’하며, 어떤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또 다른 행복이 있을 거라며, 나 또한 나만의 행복을 찾고 또 찾으려 돌아다닌 것 같다. 그땐, 어느 시점일지 아무도 모를 ‘컴퓨터 문명 시대’를 지나치더라도,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행복은 존재할 것. 그렇지만, 나는 지금 행복해야 한다며, 계속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며, 지금도 끊임없이 ‘나는 행복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렇게도 끊임없이 순간마다 대답하려는 노력은, 디지털이란 용어 등장 이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이렇듯, 디지털시대 행복을 향한 답을 찾고 싶은 것은 내 욕심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 욕심 표현의 한 사례로서, 나는 시적 표현으로 남겨 보려는 엉뚱한 시도로 이어졌다. 그 중, 하나가 30여 년 전에 썼던 <ET의 아들에게>라는 시다. 지금은 필연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노력의 하나가 기꺼이 컴퓨터계 연구소를 떠나, 이 길도 ‘가지 않은 길’이 될 것 같아, 예술계 직장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되었다.

친구여 잘 있었나
오늘도 책상에 앉아 
나의 컴퓨터에게 약속을 하였다네
오늘처럼
내일도 나의 유전자를 건네 주리라고
더 높다란 지능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컴퓨터가 가지고 있을 유전자도
많이 저장해 놓으라는 말도 함께 말일세
먼 훗날 그 다음날에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는
내 이름도 꼭 기억해 달라는 말을 못박는 것이라네
이건 비밀이네만
만일 처가 허락만 해준다면
내 컴퓨터와의 재혼 주례를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걸 믿어주게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랬듯
나도 컴퓨터에게
무엇인가 대신해주길 바란다는 걸 남겨 놓고 싶은 것이라네
혹시 우리 몇몇이 하나님에게 그랬듯
컴퓨터도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야
미리 한번 해본다는 걸 그대에게만은 고백하고 싶은 거라네
문득 새털구름 사이로 그대 손이 보이는 날을 기다리며
아침마다 한번 하늘을 보려는 버릇은
내 컴퓨터보다 먼저 그대를 만져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
그것은 친구여
나의 컴퓨터가 언제까지 살아있을는지
또한 나의 마음밭 한가운데 지도를
다른 컴퓨터에게도 전달해 놓았는지
오직 그대만이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서라네
소나무가 빽빽한 산을 보고 오겠네.
눈이 커지려는지 아파오는 걸 어쩌겠나
잘 있게
비가 올 듯하니 감기 조심하고
(졸시, ET의 아들에게, 1993)

<ET의 아들에게>를 위한 변명 
위 시의 소재로 사용된 ET는 영화 <ET>였는데, 이 영화는 첫 직장 컴퓨터 소프트웨어 연구소에 들어간 1982년도에 미국에 개봉되었다. 국내에는 1984년 개봉되었는데, 이때는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게임 개최가 확정된 상태에서 서울올림픽 전산화의 시동이 막 걸리던 시기였다. 이때부터 한국은 IT강국을 향한 큰 행보를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ET>가 컴퓨터 신기술을 먼저 도입해야 했던 연구소에 근무하던 나에게 가져다 영향은 매우 컸다. 당시 이 영화를 몇 번은 보았던 것 같다. 영화 시나리오의 상상은 둘째 치고라도, 이론으로만 접했던 컴퓨터 그래픽이나 애니메이션 처리 기술이 영화에 사용되는 것을 밤새 설쳐가며 영화 장면들을 떠올려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이 주 업무였기에 매일 12시간 넘게 컴퓨터와 씨름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문서는 모두 컴퓨터 문자로 보관했다. 물론 일기도 컴퓨터 기억장치에 보관했다. 가끔, 중요한 문서가 삭제되는 안타까운 일도 생겼다. 그러니, 여러 기억장치에 따로 보관할 수밖에. 이처럼 컴퓨터 사용의 시행착오를 줄이려는 노력은 연구소 동료들과 이런저런 토론이 밤새 이어지곤 했는데, 그때 벌였던 상상 속의 디지털시대 이야기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디지털시대의 상상 자리엔 어쩌면 ET도 알게 모르게 참여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로봇이라든지, 그 로봇이 사람처럼 행동한다든지, 또 로봇이 사람보다 똑똑해져서 사람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든지, 아니 아예 사람이 로봇이 되어 옷을 입고 있다든지, 또 인간의 아바타가 되다가 로봇의 아바타가 된다든지, 또한 어떤 인간 영혼이 제 몸을 팽개치고 다른 인간으로 들락거린다든지, 그러다가, 어쩌면 ET처럼 될 수도 있다든지 하는 등등의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컴퓨터를 향한 상상의 꼬리는 인간이 절대적 힘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며, 그 꼬리를 하늘 높이 세우곤 한다. 인간이 바벨탑을 세우려 했다는 전설 것처럼, 나 또한 가끔 절대자와 맘먹고 싶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니, 나의 컴퓨터가 내 명령을 거부할지 모른다는 나만의 걱정은 우리 인간 모두가 만든 걱정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하였다.

요즘에도 나는 내 컴퓨터에 모든 생각의 흔적을 글자들로 담고 있다. 첨단 인공지능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인공지능이 내 것을 활용해 나를 언제 어떻게 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식상할 정도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보관한 내 것을 영구히 숨기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나의 아바타 인공지능에게 내 흔적을 다른 컴퓨터에 영원히 전달해 달라고 하지만, 그는 나의 부탁을 코웃음 치며 외면할 수도 있겠다. 참, 별 쓸데없는 걱정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ET는 로봇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우습지도 않게, 인간이 진화한 것이라는 쪽의 믿음이 더 크다. 당시, 영화를 만들어 이렇게 시를 남기게 해준 영화감독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꿈도 꾸었던 것 같다. 아마 그도 ET는 컴퓨터가 아니라, 인간 쪽 편이라 생각도 했었다. 내가 가끔 소나무 보러 산에 오르듯, 영화감독도 답답할 때면 숲속 깊숙이 들어가 산책을 했었으리라. 눈을 크게 뜨며 말이다. 혹시, ET를 볼 수 있을 듯하여.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는, 그 숲길을 ET와 함께 걷고 싶다는, 어느 즐거웠던 날의 내 디지털 솟대처럼 

시 <ET의 아들에게>는 1992년 말 겨울에 썼다. 가끔, ‘ET의 아들’도 비가 오는 날, 숲속의 창가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 시를 읽고 있으리라는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그래, 그도 감기가 든다. 내가 목감기를 매년 거르지 않고 걸리는 것처럼, 감기는 가끔 들어도 된다. 며칠이면 나으니까. 그래도, 감기는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어느 날 갑자기, 인공지능 컴퓨터가 만든, 요즘의 Covid-19 같은 낯모를 인공지능 바이러스가 인터넷망을 타고, ‘나도 감기다’라며, 그의 몸에 아니 내 몸에 갑자기 들어올지 모르니 그렇다.

◆그래도, 디지털 솟대도 희망을 향한다
컴퓨터와 더불어 지낸 나날들을 돌아보면, 그 많은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있으면서, 가끔 멍청히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릴 때가 있었다. 새가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다는 새 모양의 솟대처럼, 컴퓨터특이점을 바라보고 있는 디지털 솟대가 있을까? 있다면? 그렇다면, 그중의 하나가 바로 세상에 널려있는 모니터가 될 수도 있을 터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확인할 수 있는, 원하는 것이 만들어질 때까지 계속 확인해야 하는 모니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사람을 향해 있는 그 모니터.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오래 건강하게 웃고 지내길 바라 거라며 컴퓨터 모니터도 제 마음에 새기고 새기며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의 디지털 솟대는, 저 먼 곳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새 모양 솟대가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가 될 수도 있겠거니와, 수시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어떤 의미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굳이 통신망을 통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솟대가 될 수도 있으리라. 하, 어쩌면, 메타버스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내가 바로 디지털 솟대인 듯도 하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손짓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는, 우리네 꿈을 대신 나타내 주는 디지털 솟대, 그래 좋다. 이제 그 내 모니터에게 묻고 싶은 욕심이 생길 수밖에. 특히, 20년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모니터를 보고 더욱 묻고 싶다. ‘가지 않는 길’을 선뜻 갈 수 있는 발걸음의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무작정 옛날에 그랬듯, 희망만이 답, 아니 그러한 답들은 빼고, 뭐 다른 답은 무엇이냐고. 몇몇 사람들이 먼저 만들어 가고 있는 메타버스 세상에 갈 때, 가지고 갈 것은 또 무엇이 있느냐고.

묵묵부답. 그랬다. 지금 내 디지털 솟대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내 모니터인 것 같다. 다른 대답을 하기보다 그저 꼼짝 않고 쳐다보는 것만이 답에 가깝다고, 그 어떤 모니터도 나를 향해 멀뚱거리며 커서만 껌뻑거리고 있는 것처럼. 이럴 땐, 내가 모니터 보듯, 모니터도 날 보며 나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을 거라고, 나 또한 어찌 눈만 껌뻑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내가 솟대요, 모니터일 터이며, 또한 내가 디지털 솟대라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이것이 희망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렇다, 이렇듯 문제는 내가 내고 내가 푸는 거, 맞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이러한 문제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모니터도 솟대도 나도, 보이는 만물이거나 그 만물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거나 없거나, 그 어떤 대상을 기다리는 일이란 내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편하게 누구에게라도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가지 않은 길’이나 ‘걸어온 길’ 모두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일이기에 그렇다. 이럴 즈음엔 모니터는 디지털 솟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모니터고, 컴퓨터 자판이고, 그냥 마우스는 마우스일 뿐이다. 메타버스라는 세상은 멀고 먼 가상세계인데, 쓸데없이 ‘혼자 북을 치고, 장구 치는’ 내 욕심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내가 보지 못하게 했을 것. 컴퓨터특이점을 지나칠 무렵 디지털 솟대를 세워두고 싶은 일 또한 우리네 희망일 뿐. 그렇게 희망을 향하는 일이 디지털시대 행복의 다른 이름일 뿐.

◆어느 시대든, 새길 가는 사람이 주인공           
디지털 솟대를 몰라도, 인류 역사의 큰 전환의 길목마다, 누구나 선뜻 선택하려 하지 않는 길, ‘가지 않는 길’을 성큼성큼 먼저 다가섰던 사람들이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물론, 지금 쳐다보고 있는 컴퓨터 시대도 새록새록 열릴수록,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가자며,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 그 주인공에 의해 스마트시티 문이든 메타버스 문이든 활짝 열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네 디지털시대 행복이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당신은 당신의 컴퓨터인 그 스마트폰을 들고 어떤 행복의 길을 향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아마도, 이렇게 이루어지는 서로의 만남을 통해, 그 행복의 꽃은 더 활짝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아마 컴퓨터문명 이후의 시대에도, 디지털 솟대가 없어져도, 사람은 서로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누어야,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거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는 분명 진리여야 한다. 설령, 진리도 변한다고 하지만, 이것만은 불변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디서든, 우리는 모두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맞다, 서로는 서로의 주인공이 되어, 즐겁게 던지는 질문과 행복한 대답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이렇게,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상, 참 멋진 일이 아닐까. 내가 떳떳하게 선택한 길을 즐겁게 이야기하여야 하니 말이다.

이렇듯, 가끔은 ‘디지털시대 행복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함께 그 대답을 찾아가는, 그런 기회를 만들고 또 만든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푸른 하늘 뭉게구름처럼 떠오른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와 함께, 디지털시대의 이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 물론 분명히 있다. 이 컴퓨터 문명이 그 인연의 고리를 새로 만들어 준, 새로 주어진 변화와 더불어 서로 인연이 된 생태계를 마음껏 즐기려는 사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행복 전달자의 길을 먼저 가려는 사람,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먼저 찾아 나서려 사람, 내 팔길이 부근에 있는 사람이라는 즐거운 말을 이렇게 써 본다.

그렇다, 인간과 컴퓨터가 합해지는, 이 문명의 특이점, 양자컴퓨터나 생체컴퓨터가 인간과 결합되었다가 해체되었다가 하는, 저 멀고 깊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메타버스 세상, 그 정점을 향해 걷고 있는 지금 시간을 쳐다보는 우리는, 이 글을 함께 읽는 우리는, 참 영광스러운 친구가 아닐까 다시 느껴 본다. 아, 무척 즐겁다. 이 ‘지금’을 서로 만져보고 있는 오늘은, 참 기분 좋은 날이다. 이런 욕심은 참 부려볼수록 좋다. 나는 오늘, 이 멋진 ‘디지털시대 행복’이라는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어 무척 행복하다. 하, 이것은 나만의 것일까? 아니다. 누군가는 더 있다.

아, 맞다. 이 글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고개를 끄덕이는 나 같은 분이 계시면, 그 한 분 한 분께 감사하다는 지금의 내 마음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 이 디지털시대로 향한 시계를 함께 볼 수 있을 테니. 그래서, 나도 그렇지만, 서로는 서로의 디지털 솟대가 되어, 서로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쳐다볼 수 있을 테니. 혹시, 언제 먼 훗날, 다시 이 글을 다시 읽게 될 분들도 내 마음과 같다면, 하하, 그렇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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