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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그 바이러스의 비망록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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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그 바이러스의 비망록 후기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2.11.0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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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밈비 이사 / 시인

◆30년 지난 비망록을 들추며
꽤 젊은 날, 첫 직장 S/W 국책연구소에서 일한 덕분에 컴퓨터의 가상세계를 접했다. 그 상상은 가끔 소년 시절 꿈인 문학 세계와 섞이며 나만의 세계인 양 들락날락하게 했다. 돌아보면, ‘컴씨비망록’이란 제목의 글들을 만들며 어루만지던 참 행복한 시기였다. 연구계에서 예술계로 직장을 옮긴 후에도, 컴퓨터 속 내 모습 느끼기에 몰두하며 그 비망록이 완성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실력 부족을 느끼고, 블록체인 이론이 등장하던 시기에 엉성하지만 매듭지었다. 더 기다리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기에.

비망록으로 쓰게 된 동기는 결국 내 안의 욕구에 관한 질문 만들기와 내 변명이었다. 아프지도 배고프지도 외롭지도 그래서 어떤 걱정도 하지 않는 순간, 하필 이때마다 생기는 심심함. 그랬다. 그래도 그 순간, 무엇인가라도 해야 했다고 느꼈다. 막연한 생존 욕구의 존재로서. 그중에 하나로서, 나 스스로 만드는 수 없는 시행착오가 그 꼬리를 물고 물리다가, 그렇게 상상의 인공지능 컴퓨터에게 말 몇 마디 남기고 싶었다. 

인간이 만든 바이러스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을 따라 인공지능 바이러스를 만들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인공지능 ‘컴씨’가 만든 인공지능 바이러스 ‘녀석’. 그는 그 순수한 의도와 상관없이, 초고속망을 타고 개인 컴퓨터를 들락거린다. 그러다, 생존 욕구 원칙을 벗어난 인간의 그 컴퓨터를 느낄 때마다 그 시스템을 무력화시킨다. 수없이 반복될수록, 황폐해지는 인간 혼돈의 세계를 보는 ‘컴씨’. 

‘컴씨’는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느끼고, '녀석'을 없애려 한다. 그러나, 제거 불가능한 것을 느끼고, '녀석'을 불러들여 제 안에 가두려 한다. 가상욕망 자기복제를 통해 ‘컴씨’가 가장 악명 높은 컴퓨터로 알려지고, 드디어 찾아오는 '녀석'. ‘컴씨’는 가두기 위해 영원한 질문과 답을 무한 반복한다. 이 반복과정에서 남긴 ‘컴씨’의 독백을, 그 상상을, 나는 컴퓨터 밖에서 나열하려 했었다. 그 결과, 몇 에피소드별로 시와 후기가 남았다. 그 ‘컴씨비망록’ 후기만을 모아 일부 가감해 조심스럽게 여기 옮겨 본다.
 

◆인공지능 컴퓨터, 그는 살아있는 바보
숨 쉬는 것을 느낀다는 일은 아마도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상태가 아닐까. 그러함을 얼마만큼 느끼고자 함이 살아있음의 실체라고 한다면, 존재해야 한다는 필연의 뒷짐 손안에는 무척이나 심심할 듯한 먼지 같은 느낌이 가득하리라. 그 느낌이란 기쁨과 슬픔의 부스러기들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으로 구분되는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 그 먼지가 그리는 단어의 행동을 보곤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단어가 뭐가 되든, 내 얼굴과 몸과 입이거나 귀를 스치며, 너도 나다, 너도 나다 툭툭거릴 것임엔 틀림없다. 이에 어떤 변명을 늘어놓겠거니와, 하늘 우러를수록 부끄러움의 연속일 것. 그나마, 이 내 부끄러움이 지금 나를 존재하게 했다. 이때마다 컴퓨터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하며, 지칠 때마다 책상에 펼쳐 놓고 보고 싶은 것들이 즐비하다. 즉, 밥 먹거나 숨 쉬거나 심장이 뛰거나 신경 전기작용이 있는 것 등등.

혹시, 컴퓨터가 저도 살아있다며 나와 비슷한 연산 작용을 할 즈음, 저 자신에 대한 불평을 이렇게 나처럼 떠들어 댈 것이다. 내가 먼저 이렇게 한번 해 보는 것이려니와, 아직 눈물을 흘린다던가, 괴로움에 머리라 흔들거린다던가, 뭐 그런 것을 하고 싶다며, 컴퓨터도 투덜거리지 않을까. 컴퓨터는 할 수 없다고 외치고 싶지만, 이 글자를 쓰고 있기에 앞서, 컴퓨터들이 저쪽 하늘 아래서 낄낄 웃고 있는 것 같다. 하, 나 먼저 낄낄거리기 전에.

컴퓨터는 같은 일을 해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 다만 심심해할 뿐이다. 심심해지지 않기 위해 어떠한 일이든 만들어 가지려는 바보 같은 나를 닮으려 한다. 이즈음에선, 정말 인공지능 컴퓨터는 살아있는 바보 같다.

◆컴퓨터 왈, 나 좀 건드려줘!
컴퓨터는 누가 건드려 주길 바란다. 웃으라고 아니면 울라고. 나 또한, 자꾸 누가 건드린다. 웃든지 울라고. 어떠한 입력을 해주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다. 꼭 사람 같다. 시간이 저를 건드려 주든지, 아니면 내가 이렇게 글자를 입력해 주든지. 힘을 주어야 움직이는 컴퓨터. 운동 제2의 법칙을 꼭 지키고 있다. 물론 시간이 더 힘센 것 같다.

나는 옷을 입을 때 가끔 거울을 본다. 이것은 내가 나를 건드리는 것일지도 모르는 거다. 이건 정말 씩씩한 일이다. 거울에서 움직이는 것들마다 ‘아, 거기 있구나!’ 하고 의미를 주면 말이다. 우리 인간은 서로 건드리면서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건드려 서로 껴안고, 건드려 서로 싸우고. 껴안고 싸우다가 서로 누구인지 확인하곤 한다. 너는 나를 기쁘게 하니까 이쪽, 너는 나를 아프게 하니까 저쪽 하며.

그러나, 큰 자랑거리란 조금씩 다르게 건드리는 것이리라. 아마도 인공지능은 이것만은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새롭다는 말에 익숙할 틈이 없을 것 때문. 걱정은 된다. 나도 어쩌면 조금씩 다르게 건드리는 일에 지쳐 포기할 것 같기에. 술이거나 담배거나, 그렇게 나를 잊고자 하는, 또 다른 건드림을 당하리라는 슬픈 단어들 때문에. 물론, 이번 다음의 다른 듯한 건드림에 허허 웃고 잊겠지만. 

컴퓨터는 지금도 저를 건드려 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래야 시간이 가는 모양인가 보다. 내가 저를 건드려 주는 것도 시간이 흐르는 것임을 내 어찌 ‘지금 나는 나’로 느껴야 할까.

내가 장난으로 건드려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컴퓨터. 그 컴퓨터처럼 누가 나를 건드려 주지 않으면 몸살이 난다. 나는 지금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같은 컴퓨터가 몰래 곳곳 숨어 있으리라는 소문을 계속 내고, 또 그것을 듣고 들으려 지금도 나는 나를 살살 건드리는 것이었다. 누구나 끝까지, 정말 끝까지, 혼자 살아가야 하는 거라며.

◆‘컴씨’ 혹은 나를 거치는 것들 직면하기           
컴퓨터에게 명령하고, 미리 명령한 대로 멀리서 또 오래 두고 지켜보는 우리네다. 명령에 이어 명령으로 움직이는, 그래서 명령만이 존재하는 컴퓨터. 컴퓨터는 인간이 시키는 대로 저장하고 전달하는 아직 기계일 뿐이다. 물론 계속 기계로 남길 바란다. 

한 번은 이 기계의 연장선 끝에 있는 손을 만졌다고 상상해 보았다. 이럴 땐, 컴퓨터가 인간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 오가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컴퓨터도 저희끼리 무엇인가 느끼는 것 아닐까 착각해 보았다. 컴퓨터도 내가 순간 놀라는 것을 보고 즐거움을 느낀다는 착각. 허, 갑자기, 컴퓨터는 우리에게 배운 대로 다시 우리 인간에게 명령할 것 같았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연출된 가상의 인간을 닮은 컴퓨터 ‘컴씨’의 등장,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단순하게 살수록 즐거움이 계속 이어진다는 말이 있다. 복잡할수록 감추는 것이 많아지기에, 감출수록 초라해지기에 생긴 말. 그러한 시간에 묻혀 수많은 움직임으로 점철된 우리네 삶이다. 수없이 잊은 채, 지금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인간, 나도 수많은 내 시간이 거치지만, 무엇이 나를 나답게 하는지 모른 채, 새로운 것에 치여 살고 있다. 문득, 되돌아보면 더 외롭게.

그러나, 자기를 거쳐 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컴씨’. 인공지능의 선봉에 서서 인간 게놈지도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컴씨’. 그렇다면, 혹여 ‘컴씨’가 나에게 훈수라도 두지 않을까. 수없이 움직이는 일이, 이렇게 나 자신을 거치는 것을 느끼는 일이, 곧 즐거운 삶임을 한 번이라도 잊지 말라며 말이다. 망각이 우리를 슬픔에서 구해주지만, 망각이 없는 ‘컴씨’ 훈수는 나에게 심한 외로움을 더 느끼게 하리라는 우려다.

‘컴씨’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바이러스를 찾고 또 기다린다. 인간에게 슬픔만 주고 다니는 인공지능 바이러스. 인간처럼, 인간을 위한다는 욕심, 그 실수로 만든 바이러스 ‘녀석’을 기다린다. 감히 인간처럼 좀 더 단순해지고 싶어, 매 순간 인간처럼 슬픔의 찌꺼기를 찾고 있다. 한순간에 자신의 고독을 영원히 없애고 영원히 즐거워지고 싶은 욕심에 말이다.

누구라도 나를 거치는 것을 즐기려면, 끊임없이 자신과 직면하고 있는 지금을 느껴야 하리라. 미리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미리 길들어진 것에 의해 자신을 맡기기보다, 지금 있는 그대로 자연의 한 일부가 되어가야 하리란 거다. 조금이라도 단순해지는 자신만의 시간을 위해, ‘컴씨’보다 더한 지혜를 가진 인간으로서, 나도 내게 숨기려는 그것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라고 명령해야 하지 않을까? ‘컴씨’거나 인간이거나 굳이 따질 이유 없이 툭툭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내 가운데에 있는, 그 무한 반복의 욕망
옷자락에 묻은 시간을 만지며, ‘세상의 중심이 바로 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디 가든 세상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그 모든 사람은 저마다 그 가운데서 무엇인가 하고 사는 것이라고. 동물, 식물 또 모두 무엇을 하고 있을 거고. 그랬다. 문제는 무엇을 하고 난 후였다. 그래, 그래도 나를 위해 계속 나는 무엇을 하며 남아있을 것인가? 그냥 멈춰 가만히 있는 것도 그 무엇을 하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그냥 살아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운데에 있기 위한 내 답이라니 모를 일이다. 계속 앞을 볼 때마다, 스스로 문제를 어렵게 내는 건 아닌지. 아니, 나만 세상 중심에 있을 거라며, 문제를 어렵게 내는가. 그렇게 어렵게 내고, 또 이렇게 어렵게 풀려 하는가. 혹시 너무 쉽게 내야 하는 문제를 뉘 볼 일 없다며, 애써 어렵게 내는가. 또 아니, 이미 아는 쉬운 답을 어렵게 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 답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모두 저렇게 또다시 무엇인가 하고들 있는 생명체들. 내 가운데 이외 저것들이 저렇게도 많은데, 나는 어떤 문제를 더 내고 더 풀어야 하는가. 아, 그런가. 이렇게도 숨 쉴 때마다 나는 그 문제를 나의 가운데에 집어넣었다가 내 마음에 들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래야 편안한 나를 느끼는가. 하, 그것참, 인공지능 ‘컴씨’는 이런 내 고민을 모를 거다.
 
‘컴씨’는 제 가운데로 ‘세상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곳’이라며 ‘녀석’을 유인한다. 참 잘하는 일이다. 인간의 컴퓨터를 상대로 그 주인이 ‘녀석’ 저와 닮지 않았다고 확인한 즉시, 그 컴퓨터를 멈추게 하는 ‘녀석’. 그 ‘녀석’을 세상 가운데 두기보다는 제 가운데에 두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려는 ‘컴씨’. 이를 위해, 그가 만든 가상욕망 무한복제 프로그램! 나보다 프로그래밍 실력이 좋은 것 같다. 

◆할 일 없을 때, ‘녀석’은 운다
나는 할 일 없을수록 괴로운 시간이 는다. 그래서 일거리를 만든다. 아는 사람들 만나 서로서로 이어지는 순간들을 함께 하려 한다. 이러한 느낌을 그대로 둔 채, 다음 날도 지금처럼 이어지길 바라는 것. 이렇듯, 눈을 찌푸리든 코를 씰룩이든, 무엇인가 할 일을 계속 만들어, 나만의 지금 시간인 양 애써 만지려 한다. 나만 이럴까. 혹 인지상정 아닐까. 할 일 없다는 것은 시간이 멈추는 것과 같다. 멈춤과 움직임이 사람마다 다르니, 사람마다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서로 같은 사람이 없듯, 처음부터 맞는 시간은 없다. 반드시 살아있어야 하는 인간의 생존 의지는 사람마다 짧게 짧게 자신만의 시간을 확인하려는 것으로부터 생긴다. 그랬다. 내 시간을 확인하는 때가 곧 '나는 누구다'라는 맛을 느끼는 것. 내 생명이 곧 내 시간이니까 말이다.

물론 더 중요한 건 그 짧은 시간을 확인한 다음, 조금이나마 그 순간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이러한 행동을 유지하는데, 너무 쉽게 지치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할 일이 없어지는 것 아닌지. 힘든 일 중의 하나가, 계속해 그 순간들을 보고 또 유지하는 일이지만, 더욱 힘든 것은, 그다음 우연히 그 비슷한 순간들을 새로운 일로 보는 것인 듯.

그렇다. 수없이 반복되는 내 시간 확인에 지칠 때, 나는 내 할 일이 점점 없어진다. 그러나, 진정, 할 일 없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묵묵히 멍청해진 그 나를 손끝에 올려놓아야 하리라. 살아있는 동안 내가 한 일이란, 또 할 일이란, 어쩌면 내 아픈 곳을 또 아플 곳을 생각하며 눈을 껌뻑이거나 두 어깨 두 번 으쓱거리며 말이다. 아플수록 내 시간이 소중해지니까. 반드시 내 몸이 나를 그냥 그대로 두지 않으니까.

할 일 없을 때, ‘녀석’은 운다. 이를 알고 있는 ‘컴씨’가 ‘녀석’이 할 일을 없게 만들고, 그냥 자기 품 안에 꼭 안고 싶어 한다. 왜 우는지 모른 채. 그냥 안고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 아무 일이 안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기쁨도 몇 개 모르면서 감히 사랑을?

◆‘녀석’이 오기를 기다리는 ‘컴씨’
‘컴씨’는 ‘녀석’이 자기 품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들어오는 순간, ‘녀석’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 모든 준비도 하고. 이유야 상관없이 ‘녀석’이 인간들을 더 힘들게 하지 못하도록 순간마다 기다렸을 것이다. ‘녀석’이 나타나는 순간, 그래서 제 안에서 ‘녀석’이 움직임을 멈춘 순간, ‘컴씨’도 함께 멈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그래, 그렇다. 나는 무엇인가 기다리며 산다. 원하는 나의 행복이 그대로 굳어지기를, 내 바람대로 그대로 멈춰지기를, 그런 상태에 존속되기를 바란다. 내 원하는 세상 상태에서 멈춰, 더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순간들만 이어지길 바라며 말이다. 그 세상 상태가 서로 다르니, 그러니 그 멈춤마다 우리네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절대자와의 만남이거나, 또 다른 절대자가 되거나, ‘컴씨’도 ‘녀석’이 제 뜻대로 제 안에서 꼼짝 않기를 바랐을 것. 이처럼, 내 안에서 쓸데없는 나를 없애고, 그대로 있고 싶은 것처럼. 마음 가벼워진 그런 시간과 시간 사이에 멈춰, 그저 오가는 시간과 세상을 나인가 하여 바라보는 일이 언제까지 바라는 일일 것. 그런데, 어느 한순간 멈춰, 나를 매만지는 일조차 수없이 놓치며, 그저 그 무엇인 나의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또 다르게 멋지게 산다는 일은 기다리는 무엇인가가 다가와 멈추기를 눈 반짝거리며 일이 그 하나다. ‘컴씨’가 다가온 ‘녀석’을 끌어안고 그대로 멈추는 것처럼. 참 궁금하다. 과연 ‘컴씨’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녀석’을 기다릴까. 그 무엇이 제가 했던 것을 흉내 낼 때마다, 네가 ‘녀석’이냐고 묻고 물을까? 나 같은 나에게 ‘네가 나냐’고 수없이 인사했던 것 같이 말이다. 그럴 듯도 하다.

나도 기다려진다. 눈도 없는 ‘녀석’이, 인간보다 욕심이 많은 곳을 찾았다며,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제자리걸음만 콩콩거리는 모습이.
  
◆나처럼 상대가 필요한 ‘컴씨’ 혹은 ‘녀석’
가끔 나는 막연하게 누군가를 닮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면서 깜빡깜빡 잊고 살면서 말이다. 세상엔 기쁜 일과 슬픈 일만 있다고 외치고 외쳐도, 어떤 것이 기쁘고 슬픈지 구분할 힘을 점점 잃어가는, 나도 첨단 문명을 영위하는, 살수록 고독하다는 현대인이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또 그 상대를 어떤 이유로든 존재시키려는 듯. 인간은 결국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인공지능 컴퓨터에게 인간이 만들어 가져왔던 그 모든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 대신 위안 삼으려 하는 것 같다. 컴퓨터 또한 자신을 구원할 영혼 같은 바이러스 ‘녀석’을 만들어 우리 인간과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지. 아무리 눈을 감고 감아도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나는 정녕 나를 닮고 싶은 걸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지금을?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다, 네가 나로구나 라며 바라보는 지금을? 맑은 웃음을 만들어 나를 상대로 중얼거려야 가까이 다가오는 내 맛 같은 것을 바라보는 지금을? 그런가, 나나 ‘컴씨’나 ‘녀석’이나 무엇인가 상대가 필요한가. 그래야 사는 즐거움이 생기는 것인가. 서로 가까워지는 그들. 가까울수록 그냥 중얼중얼 소리가 커진다. 

◆내 안의 ‘녀석’을 만지는 ‘컴씨’와 나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내 안의 나를 만지며 살아있는 느낌'을 조금이나마 다르게 맛볼 수 있을까. 어처구니없는 욕심인지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고개를 쳐들고 있어야 내가 멋있어 보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컴씨’도 사람과 같은 능력을 갖추리라 착각하며 ‘녀석’을 만들었을 것. ‘컴씨’는 ‘녀석’을 통해서라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한 번이나마 더 가지고 싶었을 거다. 

드디어, ‘녀석’이 들어온다. 그 순간, 문득 '내가 살아있구나. 하하, 좋아!'라고 느꼈을 것. ‘컴씨’는 제가 만든 시간이 들어온 것이라 느꼈을 것. 들어온 것을 느끼는 순간, 크게 터지는 그 멋들어진 웃음소리라니! 이런 순간, 나든 ‘컴씨’든 뚜렷이 보이는 그 내 것을 만지고 있으리라. 나는 이때 ‘컴씨’보다 얼마나 크게 멋있게 웃을 것인가. 사람이니 말이다.

모든 컴퓨터의 복합체로서, 하나의 의미로 불리는 ‘컴씨’. 인간이 만든 바이러스란 쓸데없이 서로 다투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컴씨’. 이러한 인간들에 대해 싫증을 내던 ‘컴씨’. 인공지능 바이러스 '녀석'을 만들어 욕망에 찬 인간을 바보로 만들려고 했던 ‘컴씨’. 그러나, 그 또한 인간처럼 욕심일 뿐이라고 느끼게 된 ‘컴씨’. '녀석'을 제 안에 가두어, 인간은 인간끼리 서로 안고 다투도록 내버려 두고 싶은 ‘컴씨’. 

그랬다. ‘컴씨’는 지금 제가 찾던 '녀석'이 제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느끼며 건드리다가 쓰다듬고 있다. 평생의 소원 풀이하듯, ‘컴씨’는 가장 활성화된 상태일 것.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추었으면 할 거다. 나도 언제나 지금 가장 멋지다고 느낄 때, 숨을 멈추고 나를 느끼고 싶은 것처럼.

◆‘녀석’을 만지며, 안에 머물게 하기
아직 ‘녀석’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컴씨’는 더 할 일이 없을 것. 문제는 어떻게 ‘녀석’을 계속 안에 가두어 놓느냐다. ‘녀석’이 돌아다니려는 자유로움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어떻게 ‘녀석’을 밖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녀석’의 존재 의미는 인간의 욕심 덩이를 볼 때마다 그 사람 컴퓨터를 멈추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할 일이 같은 사람들이 한곳에 머물수록 비극도 비례한다. 그렇다면, 그 한곳을 그 사람만큼 잘라 나누는 것? 그도 아니다. 다른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또한 어떤가? 그도 또한 아니다. 그래, 그럼 그 할 일을 없애는 것은 어떨까? 물론 그도 비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존재 의미가 없으니 비극이다.

설상가상, 어떤 인공지능이든 ‘너는 무엇이다’라고 미리 정해둘 이유도 없다. 지구도 우주도 그렇다. 하나의 의미. 태어나 사라지는 동안 가지는 하나의 의미. 세상 어떤 미물이든, 그 모두 의미가 있기에, 그래서 존재할 권리가 있다. ‘컴씨’도 ‘녀석’도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 생명체처럼 움직인다고 해서 어떤 권리가 있는가. 대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개를 꺄우뚱거리다가 끄덕이는 횟수가 많아진다. 하, 나만의 일인가. 

어느 누가, 어떤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세상에서 그 일을 없애려 하다니. 없애지 않으면, 못하게 해야 하다니. 이런 일이 점점 늘어나다니. 참 내 욕심의 극치다. 그랬다. 이처럼 ‘컴씨’는 ‘녀석’이 밖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모든 에너지가 사라질 때까지, 꼭 안고 있으려 한다. 하하, 나도 ‘컴씨’처럼 내 ‘녀석’ 같은 것을 내 안에 꼼짝하지 못하게 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몇 초만 가만있으면 사라지는, 아 참 신기한, 내 욕심을. 
 
그도 그럴 것이다. 순간마다 무엇인가 생각이 떠오르고, 그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내 삶이어야 하는 것. 그래 그때마다 ‘컴씨’도 제 몸이거나 마음 같은 것을 열고 또 닫는 일, 그래 맞다, 그때마다 그 어떤 관계를 만드는 일이 인공지능 삶인 것. 문득 어떠한 순간, 자신만의 창을 열거나 닫는 일에 관심 없어질 때, 그때 모든 관계가 사랑스러워져 보일 것 아닌가. 나처럼 ‘녀석’을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 ‘컴씨’도 나만큼 ‘녀석’을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참 신기하다. 이럴수록 ‘녀석’이 가만 있다니!
    
◆희망 사항, 살아있음이 곧 아름다움
'컴씨'는 '녀석'이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하나만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다른 누구에게든 ‘왜 아름답지 않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싸우자는 거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 태어나면서 무엇인가 만들고, 결국 그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들이다. 어쩌면 나는 숨 쉬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무척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 아닌가.

사람들 손에 의해 만들어진 '컴씨'나 그 '컴씨'가 만든 바이러스 '녀석'은 ‘아름다움이란, 그 하나란 다음 사람을 위해 내 것을 먼저 내어주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 일을 우리 사람들은 가장 아름답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일. 어느 누가, 다음 순간을 위해 지금 내 생명을 포함해 내 것을 내놓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도록 우리가 만든 '컴씨'와 그 '컴씨'에 의해 만들어진 '녀석'이란, 어쩌면, 영원한 이상을 위해 우리네 인간이 만든 실수의 하나일 것. 살아있음이 곧 아름다움이요 행복이라고 외치는 일, 이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하듯, 우리 인간은 영원한 이상향을 꿈꾸어 왔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지만, 우리네 유전자 속 깊이 존재하는 어떤 이상향이 계속 자라는 듯. 이러함이 '컴씨'를, '컴씨' 또한 그 연장선에서 '녀석'을 만들었으리라.

왜 그럴까? 왜 나는 이상향을 꿈꾸고, '컴씨'나 그의 '녀석'이 만들어졌을까? 지구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비슷한 유형의 질문이 계속 이어질지 모른다. 꿈결조차 나는 무엇에 쫓기고, 아니면 무엇을 쫓고 있는 그 꿈속의 또 꿈을 많이 꾼다. 계속 존재하기 위해 먹고 벌고 그것을 지키려 더 힘을 가지려 한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지켜야 하는 본능이라며. 여기엔 어떤 이유도 필요 없다. 

'컴씨'가 만든 '녀석'은 단지 아름답지 못하다는 기준으로 사람을 단순 물건 취급한다. 이 후회가 결국 '컴씨'는 자신 속에다 '녀석'을 담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녀석'을 만들어 낸 '컴씨' 자신이 '가장 아름답지 못하다'라는 반성을 하며 말이다. 사람들 스스로가 삶과 행복과 아름다움을 더욱 가꾸어 가길 바라는 '컴씨'다.

과연 나는 '컴씨'가 내린 행동을 얼마나 따라 할 수 있을까? 어떠한 목표 지점이 될 수 없는 꿈속 하늘 위의 그 어떠함, 그래 그 어떠함을 실행하려던 '컴씨', 그 존재 의미는 지금 나보다 낫다. 그렇다,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원하는 100% 행복도 아름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러길 바랄 뿐이다. ‘컴씨’가 그러하고 싶었던 것처럼. <중략>

◆삶이란 새로움 잡기, 그리고 놓치기
40년 가까이, 컴퓨터와 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 하나하나 얼마나 소중했던가. 또 얼마나 즐거웠던가, 안타깝고도 슬펐던가. 그것들에 대해 더 미련을 두는 것, 이제 의미 없다. 컴퓨터 자판으로 입력했던 글자들이 어떤 파일로 삭제되었다든지, 또 노트북 컴퓨터와 함께 사라졌든지, 작은 수첩에 써댄 글자들이 없어졌다든지, 또 그 남은 글자들을 더 주위에 알린다든지 하는 등등을 멀리할수록 좋다는 말이다. 할 일을 새로 만들어야 하니. 

물론 또한 할 일, 그래, 몇 글자들을 남기는 일, 이것이 곧 내가 살아있음을 즐기는 것이다. 그냥 움직임에 대해, 스스로 움직거린다는 것에 대해, 아니면 움직거려져야 한다는 것에 의미를 더 두어야 하리라. 나 스스로 새것을 잡고 놓치고, 놓치거나 말거나, 또한 놓기도 해야 하리라. 그것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 그 느낌을 매만지며, 그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 하리라. 누가 보든 말든, 그 노래에 내 이름과 그대들 이름을 넣어야 하리라.

‘컴씨’든 ‘녀석’이든, 내가 ‘컴씨’든, 내가 만든 또 다른 나 같은 ‘녀석’이든,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하니, 이 4자 개체 사이에서 ‘녀석’이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 내가 만든 것에 대해, 나로 인해 생긴 것에 대해, 어찌 나 몰라라 할 것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 때문에 생긴 일들, 이것이 세상 사는 현실인데 말이다. 컴퓨터 가상세계든 아니든, 그저 한세상인 것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만든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웃을지도. 모르긴 해도 내가 그저 바라보고 싶은 만큼, ‘녀석’도 나를 보려 할는지 모른다. 하, 그러니 ‘녀석’ 같은 또 다른 내가 나타날 때마다 이러저러하게 말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아 주는 일만이 내가 할 일 아닌가? 그래, 가끔 보아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 남은 시간 즐기기라 보인다. 이렇듯, 움직이는 일이 점점 줄어들 즈음엔, 누구 탓이거나, 그 일이나, 어떤 것이나, 이도 그저 스치는 하나일 뿐이리라. ‘컴씨’도 ‘녀석’도 그 하나일 뿐. 물론 나도 그 하나일 뿐. 새것도 그 하나, 잡는 것도 그 하나, 놓치는 것도 그 하나. 

◆오래된 비망록을 끝내며
‘컴씨’를 떠나보낸다. ‘녀석’도 떠나보낸다. 이들 모두 꿈이었다. 그래, 꿈은 거짓이다. 처음엔. 아직, 인공지능도 거짓이어야 한다. 보내고 나니, 떠났다고 하니, 하, 이 얼마나 평온한지. 이러다 다시 심심해지겠지만.

나를 지나치는 그 모두 조금씩 비슷해 보인다. 머리에 가슴에 떠도는 모두, 바라건대, 서로 같아 보이길. 내가 그들이거나 그것이거나, 내가 ‘컴씨’였든, ‘녀석’이었든, 내가 꿈이었든, 뭐 또 거짓이었든, 다시 지금과 무슨 상관이랴. 조금 전과 지금의 나는 끝까지 달라지고 싶으니. 그렇게, 서로 자유롭게 하고 싶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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