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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다시 그리는 ‘나와 NFT의 가치’ 상관 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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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다시 그리는 ‘나와 NFT의 가치’ 상관 곡선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2.10.1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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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밈비 이사 / 시인

◆가치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2022년 여름 막바지를 향하던 날, 블록체인으로 연결된 지인으로부터 사랑의 밥차를 운영하는 곳이 있는데, 몇 시간 반찬 만들고 심부름도 하자는 연락이 왔다. 세계의 중심이 대전이라며, 디지털 자산이 세상에 제대로 정착되기를 바라며, 봉사 정신 하나로 그 뜻을 세운 국제디지털자산위원회, 그 몇 회원의 진지함이 몹시 부러웠던 모양이다.

새벽밥을 먹고 현장에 도착, 앞치마에 일회용 모자와 장갑으로 단장하고, 닥치는 대로 다듬고 씻고 나르고, 뭐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땀을 닦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많은 분이 역전 광장 한쪽에 마련된 임시 천막에 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막 앞 부근에서 쓰레기를 줍다가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작은 돌이며 라이터, 담뱃갑, 종이뭉치, 플라스틱 토막 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나는 쓰레기라며 주었던 몇 개를 도로 놓으며, 줍는 일을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며 머뭇거리자, 누가 귀띔을 했다. 그것은 미리 온 사람 순서대로 줄을 섰다는 표식이라는 것. 이곳에 온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많았다. 뙤약볕에서 줄 서는 일보다 나만이 아는 표식으로 줄 끝에 놓고, 그늘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그들을 보며, 참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 표식도 하나의 가치를 지니고 있구나. 맞다. 순서를 나타내는 가치였다. 평소 블록체인이며 NFT에 깊은 관심 많던 나는, 저 표식도 대체 불가능한 가치의 하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떠한 방법이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것. 살아있기에 나만의 표식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만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 아닐까. 쓸데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나는 하나의 문구를 일기에 쓰고 싶어졌다. 가치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내 가치는 노력한 만큼 생긴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다. 생명이다. 이 생명의 주인인 나는 내 가치를 만지며 살아간다. 이를 자주 느끼기만 해도 나는 행복해야 할 일이다. 이 행복이란 가치를 더 느끼기 위해, 먹고 일하고 자고, 또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 과정이 어떠냐에 따라 서로 가치가 평가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웃거나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어떨 땐 하늘을 땅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도대체 ‘가치란, 혹은 나란, 뭔가’ 하는 처음 의문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지구의 수십억 년, 인류의 수백만 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가치가 생기고 사라진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 가치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다가 사람이 늘어난 만큼의 그 많은 서로 다른 가치가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 참, 신기하게도, 그 가치들은 제 역할을 하며 지금도 세상을 참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이즈음이면, 내 가치란 그저 땅으로 흐르는 물이나 하늘로 가는 바람이라고 한 번쯤 여기고 싶은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

물론, 사람의 가치는 순간순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대로 움직이는바, 저마다 그 가치가 들쭉날쭉 똑같은 게 없다. 그렇다, 내 가치란 언제나 일정한 모양새를 가지지 않는 것 같다. 웃을 때와 울 때의 내 가치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때마다 만들어지는 내 마음밭길 지도란 참으로 그때마다 꼭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함이리라. 나는 이러할 때가 있었네 하며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때, 그래, 순간마다 꼭 하나밖에 없을 그 느낌을 위해 밥 먹고 물 마시는 것이리라.

몇 년 사이, 나는 지금도 어린이처럼 믿고 싶은 것이 굳게 생기고 있었다. 인류 역사의 장마다, 아니 나의 기억이 머문 곳마다 자리매김했을 가치들, 그 가치를 바탕으로 지금의 컴퓨터가 만들어졌고, 이 문명이기를 활용해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젠 수십 년 가까이 생활 속으로 들어와, 하루가 멀다며 우리네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 속에 내가 있음을, 내 가치가 바뀌고 있음을, 문득문득 느끼고 있는 것. ‘내가 약속한 말은 내가 끝까지 지켜야 멋지다’라는 말을 블록체인의 블록 속에 의미로 남기고, 이를 나의 가치라 믿고 싶은 요즘엔 더욱 그렇다. 

물론, 내 가치의 변화를 느끼듯, 컴퓨터가 인간 뉴런과 결합하는 양자컴퓨터나 생체컴퓨터 시대를 향해, 너나없이 새로운 가치를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컴퓨터를 얼마나 사용해야 컴퓨터가 알아서 인간 말을 척척 알아들을까? 아니, 하나가 될까? 하며, 내 상상은 이렇다 하며, 그 누구에게든 내뱉으려 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먼저. 그랬다. 내가 처음이라며. 이렇게 컴퓨터는 NFT란 말이 생기는데 동기부여의 원천이 된 것이리라. 

분명, 현존하는 세상 유무형의 모든 것에는 가치가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거는 현재 가치를 만들었다. 그 가치에는 시간과 인간의 땀이 촘촘하게 배어있다. 그 가치 일부를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가지며 살아가고 있다. 나도 그렇다. 태어나 자란 만큼, 또 내가 노력한 만큼, 그 가치를 손으로 만져가며 느껴가며 말이다. 그 가치마다 나만이 느끼는 무엇인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NFT란 말은 지구의 모든 가치를 다르게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모든 가치는 미적분 되고, NFT화 된다
최근 몇 년 동안, 블록체인이란 말이 인터넷 위를 날아다니면서, 그 많은 사람이 기록한 내용을 서로 나누어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가고 있다. 이래저래, 또 다른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며 말이다. NFT,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가 유일하고, 누구의 것임을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것이 원본이다.’라는 증명서를 많은 사람이 언제라도 확인하고, 그래서 인정하는 이 방법을 블록체인 속에 넣어, 영구히 보전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당연히, 그 가치를 숫자로 표기하고 증명함으로써 사거나 팔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참으로 웬만한 말들을 무시하고 억지라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증명을 너나없이 서둘러 하고 싶기 때문이다. 보이는 자본재를 NFT를 통해 먼저 움켜쥔 이 증명 가치가 자신들에 삶에 절대적 힘을 미치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자본시장 논리에 따른다면, 아마도 세상 가치는 미적분의 공식이 새로운 법이나 규약으로 들어가, 그 모든 가치는 알기 쉽게 잘리어 새로운 단위로 표현되리라 보인다. 현재, 이를 가치의 토큰화로 부르고 있다. 이렇게 상당한 기간을 거치면서, 서로 충돌하고, 그 토큰들은 어느 한쪽으로 합해지고, 다시 커지면 나누어지고, 그러다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모든 가치는 반드시 사라지고 다르게 태어나니 말이다. 왜냐면, 다시 어떤 다른 이론이나 방법이 언제 등장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먼 훗날,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볼 때는, 서로 시간과 공간이 다르니, 기존 것을 번복해 다시 증명해야 할 것은 뻔한 일이다.

현대 정보공학의 기초를 닦았던 미래학자 제임스 마틴(Jame Martin). 그는 시스템을 설계하면서 복잡한 경우의 문제에 부닥칠수록, 그 경우의 수를 자를 수 있을 데까지 자르라고 한다. 그리고, 새 목적을 향해 그 조각들을 새 의미로 가치화하고, 이를 다시 연결해 묶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 과정에서 목적이 달라질 수도 있으므로, 이 과정을 일정 기간까지 반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이 세상의 가치들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라 다르므로, 그 의미를 모두 가치화할 수 없다. 나를 가치화하는 일 역시 그렇다. 뭐, 사람 사는 일이 모두 다를 바 없듯,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다.

블록체인 이론에 근거해 NFT라는 말이 몇 년 사이 갑자기 사용된 것은 자본주의 생리상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먼저, 새 기술을 만지작거림으로써, 잘 다룬 만큼, 내게 경제적 자유가 더 생기는 일이란 우리 인간 DNA에 누적되고 진화되는 것, 그 핵심일 테니 말이다. 당연히, NFT라는 또 다른 이름의 가치는, 그 용어는 당연히, 또 다른 모습으로 불리게 될 것도 분명하다. 아마도, 사람이 계속 태어나는 한, 그 사람 이름만큼이나 무한대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무한한 가치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그렇다.

​​​​​​​◆컴퓨터에서 떠돌아다니는 ‘마음 NFT’
스마트폰이 우리 몸으로 들어오리라는 추측은 이미 상식이 된 듯하다. 인간보조 로봇이나 아바타를 넘어, 가히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시점에서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무수히 돌아다니는 데이터로서의 의미들만 지구를 우주를 방황하게 되는 때가 돼서야 컴퓨터 이전 세계를 그리워하는 일이 유일한 낙이 될 수도 있을 것. 지금으로선 매우 불행해 보인다. 꿈과 욕망이 교차하는 희비 쌍곡선에서 진정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어떻게 얼마나 다시 느껴야 할까.

분명, 너도나도 먼저 승자로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감정을 컴퓨터 속에 넣고 있는 요즘이다. 한쪽에선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절반에 가까운 내 꿈을 먼저 실현하려 하고, 또 한쪽에선 절반을 넘어서는 내 욕망을 채우려 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이 두 몽상을 모두 내 것으로 생각하는 쪽도 있다. 수 없는 역사의 어느 장면을 봐도 이와 유사한 삼각구도는 무수히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이러한 삼각구도는 굳이 정반합의 논리와 지금은 거리가 먼 듯하다. 인간의 진리 추구를 향한 노력과는 상관없어지는 것 같아서다. 문제는 인간의 모든 자료가 컴퓨터 속으로 모두 들어가고, 그 자료를 컴퓨터가 마음껏 사용할 때 즈음, 그 엉뚱한 현상들을 예측할 수 없어서다. 컴퓨터에 의해 일률편향적인 모습이 이어지고, 인간의 뜻은 그저 과거의 유물이 되리란 억지춘향격 상상 때문이다.

아무튼, 어느 쪽이 되든, 내 행동으로 인해 새로 펼쳐질 현상을 가정하고, 먼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NFT를 발행하는 일은 지금 일어나는 세상의 변화임은 부정할 수 없다. 아니 할 수 있다면, 먼저 발행해 내 것으로 취하려 할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 나와 가족과 주변인에게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 성공해야 할 것. 물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원하는 만큼 성취했다면, 그 힘으로 인해 이런저런 풍문은 그저 멋지게 기록될 것이다. 욕망이 아니라, 꿈에 가까운 멋진 승리라고.

최근 NFT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종류, 그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눈에 먼저 띄는 그림부터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그림에 어떤 의미를 포함하는 순서 또한 당연하다. 짧은 동영상 NFT가 그 뒤를 잇는다. 물론 동영상을 위한 효과음이나 배경음악도 함께 등장할 것. 그리고, 기승전결이라는 스토리텔링의 선명한 의미가 붙은 동영상이 큰 가치로 형성될 듯. 더 나아가, 어떤 상황에 먼저 빠져들어, 맞다 틀리다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게임 NFT가 대세를 이루리라는 예측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게임 NFT는, 메타버스라는 먼 미래를 향해야 하기에, 또 다른 차원의 어떤 종류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우리 지금의 삶을 직시하면 일부 답이 나온다. 내 정체성을 반복해 느끼게 되는 형태의 게임이 주효할 것. 무조건 내 것이, 내 역할이 수치화되어야 하고, 결국, 그 힘이 남보다 커지길 바라게 된다. 문제는 어떤 수치냐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중요할까? 눈에 보이는 것의 수치? 아니다. 모두 컴퓨터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모습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 눈에 보이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힘, 그 힘의 무엇? 잘은 모르나, 내 ‘마음 NFT’일 수도 있겠다. 

​​​​​​​◆NFT는 곧 행복 덩어리여야 한다
인간의 욕망을 가치로 환산하는 일, 화폐를 사용하는 지금의 우리네 일과 다르지 않다. 가치의 수치화, 바로 화폐의 다른 행위요 그 이름이다. 컴퓨터문명이 시작되고 있는 가장 큰 첫 변화는 화폐가 컴퓨터 속으로 들어오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화폐 전쟁은 누가 인류 역사를 컴퓨터에 잘 집어넣었느냐, 그래서 컴퓨터 속에서 그 역사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활용하면서 얼마나 내가 정의한 암호화폐를 많이 사용하느냐, 그 암호화폐로 세상 가치를 NFT로 먼저 바꾸어 놓느냐 등등에 따라, 그 승패가 나뉠 것이라는 추측도 과장이 아니리라.

컴퓨터 이전이든, 컴퓨터와 일체가 되어가든, 결국 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냐라는 질문과 그 대답을 하며 사는 일은 어느 경우든 같다. 문제는 어떻게 느끼냐다. 이는 컴퓨터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컴퓨터라는 문명이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이든 그 효율성이 떨어져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NFT를 어떻게 나와 가깝게 관련지을 것이냐가 얼마나 행복을 더 느낄 것이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유기도 하다.
 
최근, 어떤 사업을 하든, NFT와 연관을 짓느냐가 어떻게 내 행복감을 너나없이 기본계획에 포함하느냐와 같다. 이러한 사업들이 성공하려면, NFT를 제작한 발행자는 이를 처음 수용한 구매자들에게 지속적인 수익모델을 제시하도록 그 방안을 끊임없이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이든, 매번 다른 차익만을 추구하는 사업모델은, NFT가 아니더라도, 결국 실패한다. 따라서, 처음 NFT를 발행할 때, 마지막 구매자의 수익이 계속 발생할 수 있도록, 발행자가 끊임없는 행복을 향한 나비효과의 바람을 일으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나비의 그 작은 바람이란 어쩌면, 내가 나를 즐겁게 하는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이는 작은 펄럭임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NFT는, 디지털로 표시되는 이 행복 숫자는, 어쩌면 내 즐거움의 다른 모양일 수도 있기에, 내가 만든 NFT는 내가 만들게 될 미래의 내 모습이라는 자세로 사랑과 정을 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쁜 NFT가 될 것이냐, 슬프게 할 것이냐, 이 기준은 지금의 나를 끝까지 기쁘게 하리라는 지금의 내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확신이다. 끝까지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떳떳하게 ‘나는 나다’라고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NFT는 없다, 100% 행복 없듯
많은 사람은 공통으로 말하고 싶은 이상적인 NFT 효용은, ‘지금 순간만이 최고 삶이다’라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항상 나와 관련된 대상의 의미와 가치가 언제 직시해도 살아 꿈틀거리는 즐거운 소리가 들리게 하느냐로 귀결된다. NFT 제작이란 세상의 가치를 디지털로 옮기는 일이라고 할 때, 기존 가치란 누군가 살아온 모든 것이라 할 수 있기에, 이를 제작하는 사람의 작은 정성을 기존 가치에 살짝 얹히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탄생하는 조금 달라진 그 가치는, 즉 그 NFT는, 그다음 사람에게 ‘지금’이라는 행복감을 주는 힘이 될 것이란 명제는 당연하다. 어떤 정체성이라도, 그것이 진화되면서 역사는 흘러왔기에 그렇다. 그러니, 다음도 이렇게 조금씩 ‘지금’이 다르게 전달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다만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인해, 그 가치가 수없이 내게 스치는바, ‘어떻게’ 손을 내밀어, 한두 개일망정, 내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드느냐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그 작은 다름을 컴퓨터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원래 가지고 있던, 망각의 동물이라는 인간, 그렇게 천연스럽게 살아가는 인간, 그 본연 모습과는 다르게, 인간이 만든 컴퓨터라는 기계가 인간을 인간이지 못하게, 인간을 컴퓨터화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더 엉뚱한 상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금 개정되지 않은 채 현존하고 있는 법이다.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든 법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아니 똘똘 뭉쳐있다. 이는 우리 인간이 인간 상호 신뢰를 서로 움켜쥐고 있기에, 더 서로의 자유를 서로 억압하고 있는 것이라 보인다. 이를 타파하는 일은 법을 없애는 일일 것. 그러나, 이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컴퓨터문명의 특이점을 지나는 시점에서는 가능해지리란 또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된다. 즉, 컴퓨터문명에 익숙해질수록 상호 신뢰가 100%에 가까워지리라는 믿음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럴까? 그때가 되면, 법이 필요 없어질까? 아니 완벽한 법이 만들어질까? 모두 그럴듯하다. 참 나도 별난 걱정을 다 한다.

NFT가 완벽해질 무렵, 어쩌면 내가 그때의 나로 이어진다면, 그때의 또 다른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완벽한 감시사회 속에서 기계처럼 될지, 아니면 최고의 유토피아와 같은 모습으로 항상 웃으며 살게 될지, 지금은 모른다. 그때의 내가 컴퓨터가 되어버리는, 아니 컴퓨터가 그때의 내가 되어버리는 일일지 또한 모른다. 물론 NFT의 끝이란, 세상의 디지털화 100%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미리 당겨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땐, 그때의 ‘나란 NFT’는 형체가 없어졌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그냥 데이터로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그렇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NFT다
돌아보면, 컴퓨터를 40년 가까이 사용하면서 겨우 느낀 것이라곤, 컴퓨터를 손에서 놓게 되면 무엇인가 허전해진다는 것뿐이다. 과연 이 허전함이란 ‘세상은 결국, 혼자 살아가야 한다.’라는 많은 사람의 독백이 저마다의 귀에 윙윙거려서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인이 될수록 기계화 아니 컴퓨터화된다는 의미일까. 미래 모습을 상상해 소설이나 그림 혹은 음악으로 나타내려는 사람들 일부는 이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하리라. 고도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스스로 외로움을 타게 될 수도 있다는 사람들의 몇몇 상상은 희로애락이 아닌, 무엇인가 또 다른 감정을 가지게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NFT다.’로 바꾸어 보자. 참 단순하게 내가 NFT라고 우겨보자. 그러니까, 내가 뭐 지금 보이는 그 어떤 물건과 뭐 다르냐 우겨보자는 것. 뭐 내가 더 단순해질 수 없다고 잠깐이나마 그대로 그냥 있어 보자는 것. 이렇게, 컴퓨터 자판에 얹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 이렇게, ‘고로 나는 NFT다’ … ‘나는 NFT다’ …

잠시, 몇 초인지, 그렇게 내가 흘렀다. 허, 내가 가치가 있는가? 내가 NFT인가? 이쯤에선, NFT란 말을 농구공에 넣고, 통통 튕기며 길거리를 활보하고 싶어진다. ‘이것이 나요, 나요’ 하며 말이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겠지만. 어쩌면, 어떤 특별한 훗날 컴퓨터가 사람처럼 길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농구공을 튕기고 다닐 즈음, 혹여 그때 ‘나’라는 그 무엇이 있다면, 달려가 농구공 서로 만지기 놀이를 할지도 모른다. 농구공을 서로 만지는 순간, ‘어, 그때 내가 아니네’ 하며 망설이고 있는 동안, 또 농구공을 뺏기고, ‘아, 맞을지 몰라’ 하며 악착같이 뺏으려 하는 심심풀이 놀이를 말이다. 

물론, 사는 일이 곧 노는 일이 될 즈음엔, ‘내가 NFT다’ 하며 자랑하고 싶어, ‘나는 아직 애벌레’이기에, 저 맑은 세상 한번 구경하고 싶다며, 허물을 더 벗고 싶다며, 잠시 꿈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 삶에 만족하지 않으려는 욕심인 줄 알면서 말이다. 그래, 더 노는 일도 사라질 즈음, 내 NFT를, 내 가치를, 최소로 줄여보면 어떨까. 그럼 나를 조금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러나, 어찌 나 스스로 내 가치를 계속 줄여갈 수 있겠는가. 다만, 내 꿈에 가까운 내 현실을 가끔은 느끼고 싶으니 어쩔 것인가. 

세상의 어떤 의미도 그 가치도 NFT로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억지춘향격 꿈같은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나열해야, 어쩌다가 한 번이나마 크게 웃어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 지나쳐온 내 가치를, 그 내 과거를 두고, 이렇게라도 고개 숙이고 싶은 것을 어찌하라. 그러면 어찌 알겠는가. 그 애벌레가, 대부분 애벌레는 애벌레로 사라지겠지만, 그 몇 개 애벌레가 잠시 다른 세상을 향해 날개를 한 번 펄럭일지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은 그 날개를 펄럭였는지, 아니 펄럭거렸는지, 잘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 왔겠지만 말이다. 
 

대전 사랑의 밥차 입구 줄서기 방식
대전 사랑의 밥차 입구 줄서기 방식

다시 사랑의 밥차 근처를 오갔던 대전역 주차장 행사장이 떠오른다. 주차장 근처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임시 건물에서는 밑반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구마 줄기의 껍질을 벗기는 일을 2시간 가까이하다 보니, 손톱에 풀물이 들었다. 그러다 손톱 밑이 따끔거려왔다. 허허,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손톱을 괜히 깎았네’ 하는 농담을 하며 괜한 즐거운 웃음이 지었다. 이런저런 심심풀이 말을 나누던 봉사자의 덩달아 웃는 모습이 싱그러웠다. 하하, 이 모습도 NFT?

내 것을 어디엔가 내려놓고 보는 일, 분명 그 자체가 NFT 소각, 어떤 가치 소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가치를 줄여가는 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어놓는 일이 이렇게 가치가 있다니! 선물을 받는 일보다 선물 주는 마음이 더 즐겁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던 것조차 좀 부끄럽다. 하필 이럴 때 NFT라는 말을 곁들이다니! 그래 NFT와는 어떤 관련이 없어도 되는데. 맞다, 나는 잠시 더 고개 숙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 나는 고갤 푹 숙이는 일을 언제라도 해야 하는 애벌레임이 맞다. 더 벗을 허물도 고개 숙일 일도 없어지면, 그러면 그냥 그 나만 있을 테니. 언제든 나를 쉽게 볼 수 있을 테니.

​​​​​​​◆참 작은 내가 나에겐 최고의 NFT
가치란 나이가 들수록 조금 줄어드는 것을 다시 느끼는 요즘이다. 새로운 꿈을 꾸는 것도, 그래서 새 인물을 만나, 또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지난 일을 뒤적거리는 일이 많아진 이유일까. ‘어떤 일을 하더라도 더 실패하면, 안돼!’ 하며, ‘그래, 조금만 먹지 뭐’ 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 참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내가 NFT니, 나의 그 무엇을 NFT로 만드니, 언젠가 꿈꾸었던 모습이 저 NFT야 라며, 기꺼이 내 것으로 모으고 싶은 의미도 작아지고 있다. 

컴퓨터문명이 코앞을 스치며, 넌,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지만, 괜히 ‘왜 이렇게 코가 간지럽지’ 하며 코를 매만지는 또 요즘이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NFT 세상을 건너야 하는 통과의례라면, 기왕이면 NFT를 만들거나 팔거나 보관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NFT라도, 참 소중하게 다루길 바라는 마음만은 간절하다. 그 NFT가 가진 의미를, ’NFT는 돈이 아니라, 내 코다‘라며, 내 코끝 어루만지듯, 그렇게 사랑스럽게 대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사소한 것을 자주 지나치며 산다. 태어나 자라면서, 누구나 나만의, 그 하나의 의미를 세우려 애쓰는데도 말이다. 하루하루 보내면서 보이는 모두가 나라는 NFT와 관련이 있다며, 지나치는 그 모두와 웃으려 한다면 어떨까.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나 움직임에 그 어떤 의미가 생기지 않을까. 그럴 즈음, ‘큰 바위 얼굴’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 의미는 곧 그만의 NFT’라고 하지 않을까. 

대전역 주차장 사랑의 밥차 행사장 뙤약볕에서, 자신 대신 줄서기 하는, 그 내 아바타와 같은 분신, NFT를 다시 떠올려 본다. 누구라도 의미를 부여하면 가치가 생기는 것이구나, 살아있어 움직이는 만큼 가치가 생기는 것이로구나, 그 가치는 다른 어느 것과 결코 비교하는 것이 아니구나… 아, 그래, 고맙다. 고개를 더 떨구게 해주어서. 

아, 세상 무엇이든 가치가 없는 것 어디 있으랴. 분명, 그 많은 것 중, 내 것이 있다. 내 가치가. 컴퓨터문명이 오든 가든, 그 모든 가치가 NFT가 되든 말든, 그래 보이는 것 모두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잠시, 이 세상에 나를 존재하게 했던 것들을 떠올려 본다. 아, 그래, 그 모두는 가치가 있으니, 언제든 NFT로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푹 숙였던 고개를 조금 들게 한다. 맞아, 그 모든 NFT 중에 ‘작은 내가 나에겐 최고의 NFT다’며 말이다. 물론, 살아있는 동안만의 NFT. 

지금은 졸린 오후다. 눈을 크게 뜬다. 또 몇 번 깊게 감는다. 밖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린다. 멋진 구름을 에돌다가 가을로 가는 바람이 책상에 와 앉는다. 잠깐 쉬라며, 나와도 놀자며. 고맙다. 아, 그래, 이렇듯, 산다는 것은 이 세상과 다른 인연을 계속 맺는 일, 아, 맞을 듯하다. 나를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컴퓨터 전원 같은 이 힘은, 지금이라는 이 가치는, 분명 ‘그 어떤, 내 욕심’이라는 것, 분명 맞다. 어쩌면, ‘내 욕심이 곧 NFT’일 수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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