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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메타버스 씨앗, 그 DAO Club 빌딩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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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메타버스 씨앗, 그 DAO Club 빌딩이 보이는 풍경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2.06.2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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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밈비 이사 / 시인

◆다시 느껴보는 내 삶의 생태계
지구는 항상 움직이고 있다. 태양계도 우리 은하계도, 어쩌면 우주도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낮이든 밤이든 하늘을 볼 때마다, 나도 움직이고 있구나 하고 느껴본다. 지구나 태양이나 우주를 상대로 나는 내 마음대로 걸어 다닌다며, 이들과 감히 맞대응하고 있다. 참 영광스럽게도 말이다. 어쩌면, 지구는 나에게, 기왕 이 지구에 존재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과 잘 조화를 맞추어가며 살아보라고, 나를 올바로 서 있게 하는 것 같다. 

물론, 지구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들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에는 생존과 진화라는 지구 생태계가 생명체처럼 존재해 왔다. 아니, 지구 자체가 생명체일 것. 그렇게, 인간을 포함해, 그 많은 서로의 것을 당기며 존재하게 하고 있다. 그 움직임의 한 가운데 인간이 있고, 인간 서로 어떠한 이유든 관련성을 맺으며, 그때마다 그들만의 생태계를 만들어 존재해 왔다. 

누구나 나도 인간이니, 그 인간 생태계의 한쪽 귀퉁이를 붙잡고, 지금이라는 끄트머리에서 알 수 없는 어떤 생태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앞자락이든 끝자락이든, 그곳에서는 내가 그 한 가운데 있고, 그래서 내가 세상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었다. 내가 없으면, 어떤 생태계도 없다며 말이다. 그 모든 인간이 참으로 건방져진 이유일 듯도 하다. 

이렇듯, 모든 사람은 저마다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한 생태계’를 만들고, 내 시간이라는 자동차를 타고 길 없는 세상 속을 누비고 다닌다. 내가 멈추면, 나를 위한 생태계도 멈춘다며,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맞다, 나는 늘 움직거리며 나를 먼저 자각하려 한다. 그와 동시에 가족과 이웃 몇몇과 언어나 문화가 비슷하다고 느끼려 한다. 계속 잘살고 있어야 하는 내 정체성 확인에 다름 아닌 것.

내가 어떤 생태계에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마다, 나와 비슷한 감정이 가득하다며, 그들도 나와 같은 또 다른 나를 가지고 있다며, ‘우리’라는 말로 서로는 가까움을 나타내려 한다. 지구촌, 그 지역 어디든 그렇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나온 이유를 지금 다시 느껴본다. 하긴, 과거 누구라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다. 아니, 끼리끼리 알면서도 쉬쉬하며, 어제도 오늘, 내일도 오늘이라 우기며, 하루하루 지내온 것일 거다. 

◆갑자기 다가온 컴퓨터 생태계
그랬다. 현존하는 80억 가까운 세계인은 그 어떠한 이유든 ‘상호 관련성’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 이 복잡한 상호 관련성을 잘 이어받은 사람들 중심으로 그 구심점들이 세계 곳곳마다 만들어져 있고, 지금도 삼삼오오 중심축이 분열과 재결합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 생태계는 내게 유리하도록 변신을 계속해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신의 속도가 컴퓨터로 인해 너무 빨라졌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자, 그 많은 사람이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컴퓨터를 의식주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달고 사는 지금이다. 즉, 새로운 생태계가 인간관계 중심보다, 컴퓨터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인터넷 생활 30년 만에, 디지털 생태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그 오래된 수천 년의 인간 문화가, 블록체인 이론이 등장한 지 15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문명이란 새로운 세상의 특이점으로 한순간에 빨려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음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기웃거리며, 뭐가 나타날까 하는 질문과 대답을 컴퓨터 공간에다 해댈 뿐이다.

30 몇 년을 거치는 동안, 나는 그 매일, 컴퓨터와 더불어 살아온 듯하다. 또 그 기간, 언제든 나를 향해, ‘모르는 것이 뭐냐’는 듯 껌뻑이는 커서를 지금 보며 살고 있다. 그 껌뻑이는 사이마다, 아마도 길들어지는 것이 오히려 편안해지려는 마음인가, 나도 모르게 눈 깜빡이듯, 내 마음도 껌뻑거린다. 컴퓨터 생태계에 동기화되는 요즈음, 나도 모르게 컴퓨터를 닮아가는 것인지, 컴퓨터가 나를 흉내 내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아지는 것이었다. 

◆컴퓨터와 함께 달라지는 나
어쩌면, 나는 행복이라는 순간이, 그 정의가, 이처럼 바뀐 것에 무디어진 모양이다. 분명, 바뀌었으리라 느끼면서, 뭐랄까, 이를 설명하려는 다른 감정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그랬다, 그저 무감각한 순간만이 이대로 이어지길 바라는 일, 몇백 년 후, 미래 어느 한 인간의 사는 사례도 될 듯하다.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류 자산과 그 사례들은 거의 디지털로 변환해 저장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마다 그 많은 사람이 남긴 사례처럼, 나도 내 사례를 남기고 있다. 그랬다. 언제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는 시대를 손끝마다 지나쳐 오고 있는 것. 이제 컴퓨터가 몸의 하나가 되어가건만, 뭐가 멋진 사례인지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더 알 것이 생기기나 할까 하는 막연함이 그냥 귓가 바람처럼 그냥 스칠 뿐이다. 

아, 그렇다면, 뭐, 뭐라도 더 알면 더 행복해질까? 하, 아니다, 아닐 것 같다. 아니면, 혹시, 그동안 내가 알아 왔던 것들이 나를 재밌게 할까? ‘내가 무엇인가 알았다’라는 순간, 그 내 꿈틀거림이 곧 나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일까? 허허, 이도, 점점 컴퓨터 일부가 되어가는 듯한 내 실체를 설명하기엔, 뭔가 명확지 않다.

내 안에 있었던, 그냥 불쑥 튀어나온 의미, 그래 ‘너는 무엇이냐’라는 그 단어 조각들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그 의미를 설명하는 구구절절 변명거리들을 며칠 몇 날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도무지 설명할 수 없어, ‘너는 그 다른 무엇이냐’며 계속 질문만 해대는 요즘이다. 대답하려다 보면, 대답도 다시 질문이 되어버리는, 또 그 지금이다.

맞다, 이 ‘나만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만은 컴퓨터에게 묻고 싶지 않았다. ‘내 안의 그것’이란, 컴퓨터든 밥이든 행복이든, 뭐 이런 것들과 서로 비슷하기만 하다. 나나 이런 것들이 뭐 다를까? 그래도, 그럴 줄 알면서도 묻고 또 묻고 싶은 것은, 그렇게 묻다 보면, 컴퓨터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 다른 느낌을, 언젠가는 나 스스로 눈치챌 것 같아서다. 어쩌면, 질문만 계속하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컴퓨터와 나누는 쓸데없는 고독
문득, 다가오는 시간 느낄 적마다, 날 건드리듯, 손바닥만한 컴퓨터 그 스마트폰 건드려, 그 안을 들여다보는데…, 보다가 밥 먹기도 물 마시기도 하는데, 뭐 또 좋다고 이를 들고 화장실도 오가는데, 지치면 머리맡에 두고 꿈같은 동영상도 보내는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맞이하는 일상이라니, 컴퓨터 가지고 사는 일이 인생인가 확인해 보는데…, 물론, 이를 반복하기 위해, 아침 점심 저녁마다, 일정한 에너지를 세상에서 구해 내 몸에 마음에 채워 넣는데…. 

그렇게 컴퓨터와 1:1 마주한 혼자의 시간, 그 몇십 년, 내 나이에 내 지친 고독을 더하면서, 이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문득, 어떨 땐 그저 사는 일이 고독인지, 어제가 오늘인지, 또 내일은 다른 고독이 될 것인지, 뭐 그게 그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렇게,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 내 고독이 내 안에서 몸부림칠 때, 그래도 마지막 떠오르는 건 내 얼굴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세상 시간이 내 얼굴에 묻고 묻어 생긴 주름을 만져본다. 이도 내 거라며, 가끔 스마트폰에 찍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도 본다. 그래, 처음 보는 색깔이구나 하며, 이도 고독이구나 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손 꽉 움켜쥐어 본다, 그래그래, 이것도 나의 삶이로구나 만지며, 그 어떤 절대성을 부여해 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몇 번은 컴퓨터 속에서나마 내 얼굴도 내 것이라며 꼭 안아 보며 말이다. 하하, 이도 행복이라며 어떨 땐 웃기도 하며.

그랬다. 무엇이든 보이는 것마다, 나만의 행복이라며 절대적 의미를 붙이던 때가 있었다. 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붙들고 살았던 것.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자, 그러니, 왜 절대적인지, 왜 컴퓨터와 함께 그렇게 살아왔는지, 이것만은, 그래, 묻지 말자, 어떤 이의를 달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시간, 지금은 그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이로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 하필 이 원고를 만들고 있는 컴퓨터와 마주한 시간이라니, 점점 그 시간이 늘어가다니, 컴퓨터 없이 원고 한 장 넘기기 힘들어지다니, 그렇다면 나는 곧 컴퓨터 아닌가?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원고를 더 만들어 본다. 어둠에 글자 하나하나 더 만들어 간다. 무엇인가 내 빈 가슴팍에 내 시간 틈마다 계속 채워 넣는 이것은 혼자만의 고독인가, 행복인가. 아니면, 전원 나간 컴퓨터 소프트웨어처럼 그 아무것도 아닌가?

다시 눈을 뜨고, 컴퓨터 화면을 본다. 들여보다 컴퓨터 없는 시간이란 어떨까 상상해 본다. 그땐 다른 어떤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까? 길까 조용할까, 또 포근할까, 그런저런 시시콜콜하게 확인해 보는데, 하, 이것도 고독이라 하는데, 그때의 ‘지금’이나, 지금의 ‘지금’이나, 뭐 다른 그 ‘지금’이겠지만, 그래서 문득 이 쓸데없이 고독한 컴퓨터와의 마주침이라니! 언제였던가, 멍하니 하늘가 구름과 마주했던 느낌이 하필 이때 떠오르다니! 하, 그래, 이럴 땐, 고개 푹 숙이는 일이 상책이라 하는데….

그야말로 컴퓨터와 나누는 쓸데없는 고독이 땅에 뚝뚝 떨어질 땐, 처음 지어보는 웃음이란 듯 입술을 움직거려진다, 그래, 또 숨 쉬고 있음을 느끼는 지금은 분명 컴퓨터와 상관없는 것. 어쩌면,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 나는 참 쓸데없이 고독해 보이는 컴퓨터에게 어떤 대답이라도 듣고 싶어 하는가 보다. 컴퓨터와의 고독이든 나와의 고독이든, 이럴 즈음엔 나는 참으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 모두 그 시간마다 그 장소마다 다르니, 또 그 시간 장소를 매번 잊으니, 허허, 잊으니, 나는 내 지금을 견디는 것이었다.

◆컴퓨터 생태계의 초기 현상
그래도, 나는, 참 신기하게도, 그 많은 나만의 시간을 살아왔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그야말로 기적 같다. 어쩌면 기적이 매번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일. 그러한 순간 사이마다, 나는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참으로 무의미해진다는 것. 본능이겠으나. 다른 나를 느끼고 싶다는 것이 원인일지 모르지만, 언제 어느 때라도 컴퓨터 화면을 통해 나는 나를 드러내야, 내 맛있는 침을 삼키듯, 내 것을 맛보곤 한다.
 
그랬다. 가끔은 이렇게, 내 컴퓨터와 나만의 그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나는 내가 움직이는 것에서 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테니, 그 의미를 내 컴퓨터에 남겨 놓고 있을 테니. 그래야 살아져 있을 테니. 언제라도 내가 흘려놓은 흔적을 확인하며, 나 쓰다듬듯, 내 컴퓨터를 웃으며 매만지고 있을 테니.

자, 언제라도 그랬듯, 내 컴퓨터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는 ‘무엇’을 하며 더 움직거릴까? 생명체로서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다시 에너지를 써서, 받아들일 에너지를 만드는 일, 그것이 그 ‘무엇’일까? 이런 내 느낌을, 이렇듯 글자로 나열하는 일도 그 무엇에 해당할까? 어쩌면, 그래도, 이나마 지금 느낌을 나열하는 일이 있으니, 이 컴퓨터 시대에도, 이 컴퓨터를 이용해 살게 되는 나만의 일이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일 것. 맞을까? 맞을 거다.

툭하면 컴퓨터를 찾아, 나만의 컴퓨터와 생활하는 습관이 늘어나니, 나 또한 혼자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에게 묻지 않고, 컴퓨터를 통해 정보는 언제든 찾아 해결하려 하곤 했다. 그러니, 많은 사람 모두 그 어떤 질문과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이러한 습관이, 컴퓨터와 함께 사는 현대인의 고독이, 새로운 형태의 대화와 만남을 만든다. 점점, SNS 무대로 생활 영역이 바뀌고 있는 것. 컴퓨터가 만든 고독을 피하는 곳이다. 

SNS 성숙 기간이 짧아, 이를 통해 새로운 인연의 고리를 만들기에는 아직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그럴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에 걸려 멈칫거린다. 그동안 익숙한 만남이란, 가족을 중심으로 동네 혹은 학교 친구나 직장 동료, 또 이들을 통하고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동안 앞선 사람들이 물려준 유전인자의 그 어떠함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젠 이 전통적인 방식의 모임이 컴퓨터 매체 중심의 모임 형태에 익숙할 수밖에. 

물론,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은 생활의 변곡점마다 있었다. 컴퓨터 문명으로 가는 사회 변화의 특이점을 보고 있는 지금은, 두려움에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려는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하리라. 지금 컴퓨터 곳곳마다 활성화된 SNS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아고라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더욱 그렇다. 컴퓨터에 의한, 인간을 위한, 컴퓨터의 생태계에서 더욱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SNS다. 

◆SNS의 꽃 DAO는 블록체인의 아고라
새로운 이름의 컴퓨터 생태계, 블록체인 생활화와 함께 등장하고 있는 분산자율조직(DAO, 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이란 이름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즉, 서로 생존 욕구에 의한, 오직 컴퓨터를 통해서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디지털시대의 자율 조직’, 바로, 내 컴퓨터 행위의 피난처일지도 모르는, 블록체인이 만든 SNS의 또 다른 꽃이다.

블록체인 이론은 생산과 소비를 투명하게 기록하고, 개개인이 이를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이 기록에 어떤 이의를 달지 못한다. 이 모든 이들이 하는 확인은 이 블록체인 시스템을 신뢰하도록 만들고, 하나의 절대적 의미로 통합하게 된다. 이 안에서 자유로이 개인의 행복을 저마다 느끼도록 하는 거대한 순환 시스템, 즉 컴퓨터 생태계 DAO가 조성되고 있다. 가히, 국경을 초월하는 블록체인의 아고라인 셈인 바, 현실과 가상을 위한 디지털트윈의 새로운 힘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현존하는 유무형의 가치를 가진 모든 자산은 점점 디지털자산으로 변모할 것이다’라는 미래 학자들의 말이 세상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 시류에 맞춰, 나도 ‘가치를 상징하는 힘이 있다’며, 먼저 그 힘을 디지털자산으로 만드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내 디지털자산을 어떻게 알리느냐다. 널리 알려져 계속 찾는 사람이 많아지느냐다. 

새로운 디지털자산의 첫 번째 열매는 역시 암호화폐다. 이 암화화폐가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다만, 반드시 자리 잡게 될 것인바, 그 과정에서 새로운 DAO가 나타나면서, 지금의 국가 형태가 아닌, 서로 유사한 DAO 끼리 서로 묶이고 나뉘고 또 묶이며, 웬만한 국가 규모보다 더 큰 DAO 연합체로 형성되고 있다. 이 뒷면에는 세계 굴지의 다국적기업이 있을 것. 또 이들 기업 움직이는 거대 자본이 서로 보이지 않는 힘자랑을 하고 있을 것. 더 상상은 낭비.

지구 전체의 자산 규모에 비하면, 즉, 그 자산이 디지털자산으로 나타나는 암호화폐 시가 총액은 아직 발걸음을 떼지 못한 아기 장난감과 같은 가치에 불과하다. 조금 힘 있는 누가 툭 치면 휘청 넘어지는 블록체인 산업일 수 있지만, 그 아기 같은 블록체인 생태계는 분명 점점 크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점, 갑자기 커진 블록체인과 그 암호화폐가 지구 자산을 디지털로 구분할 것은 분명하다. 어느 아기 암호화폐가, 어떤 DAO를 통해 성장해, 새로운 가치 환산의 새 주인공이 될지 모르는 이야기다.

◆빠른 DAO 참여자가 암호화폐 기득권자 
그렇다면, DAO의 Symbolic Power 형성은 암호화폐 수집가 중심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은 가설이 아닌 정설이 될 것. 먼저 참여하는 자가 최상의 암호화폐 관련 정보를 먼저 움켜쥘 확률이 높고, 이러한 정보가 DAO 내에서, 다양한 토론과 의견을 참고할 수 있어, 최적의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짧은 시간 안에 암호화폐 기득권층으로 가는 힘이 될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먼저 참여하는 사람이 ‘공공의 가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DAO의 형성과정을 몇 개를 들춰보자.

먼저, 토큰 에어드롭에서 DAO 형태가 갖추어진다. 현재 스마트폰에 있는 앱(APP, Application)들은 정보의 중앙독점 방식이다. 이 앱들이 개별분산처리 방식의 블록체인 생활형 댑(DAPP, Decentralized Application)으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그러다 보니, 블록체인의 합의/공증 처리방식을 선점한 메인넷이 기득권을 가진다. 이 기득권이 일종을 표준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존 메인넷 내에서 운영되는 DAPP들이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 그 DAPP의 토큰이 알려져야 하는데, 이때 홍보용 토큰을 불특정 다수에게 무료로 나누어 줌과 동시에 사전 판매를 시행한다. 무료로 에어드롭을 받은 사용자와 미리 저렴한 가격으로 그 토큰을 구매한 사용자들이 모여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경우의 DAO다. 

또 하나의 경우는, 새로 만들어지는 코인/토큰을 자력으로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하고, 이를 장외거래로 직접, 방문판매 하듯이, 판매하는 경우. 이때는 기존에 컴퓨터망 없이 형성된 판매 조직을 기반으로 신규 참여자를 늘려가는 형태다. 즉, 기존 생활 형태에 적응되었던 판매 조직이 디지털화되는 과정이라 해도 맞을 것. 생활 변화에 따라 암호화폐가 어떤 산업구조로부터 먼저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옥석이 가려질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옥석의 발원지와 일부 디지털 인플루언서(Influencer) 중심으로 새로운 DAO는 형성될 것. 

물론, 본격적으로 DAO가 형성되는 것은 암호화폐의 제도권 편입 시기다. 지금 진행 중인, KYC의 내 신분 인증과 부정자금세탁방지법 AML이 발효됨에 따라 암호화폐가 제도권으로 진입되고 있는 과정이다. 적극적인 진입 시기의 뜸을 들이고 있지만, 시중 금융권에서 암호화폐를 취급하는 시점이면, 이들 광고를 보고 많은 사람이 너나없이 암호화폐를 보유하게 될 것. 이때, 묻지마식의 DAO 형성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새로운 DAO 공간을 찾는 사람들
‘디지털 세상’이란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혼합된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집을 나서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누구나 집으로 향한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미 몸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것. 길을 걷거나, 식사하거나, 전철을 타고 있거나, 잠을 잘 때도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다. 이제 곧 몸속으로 들어올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모든 생활 중심에 스마트폰이 있다 보니, 공부하거나 일하거나 노는 곳은 물론 시간도 구분되지 않는 추세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생활 공간의 변화로 이어질 추세다. 여기에 디지털 생활이라는 문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증명이나 하려는 듯이 사람들 모이는 공간의 특성이 바뀌고 있다. 

커피전문점 어디를 가도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놓고, 일하는 건지 노는 건지 자료 찾는 건지 혼자 그렇게 앉아 있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혼자 있는 게 특별한 모습도 아니고, 나아가 이들끼리 서로 이야기 나누는 일 또한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것이다. 이즈음이면, 이제 커피전문점이라고 부르기보다, 다른 특별한 무엇으로 불리어야 할 것. 디지털 삶의 다른 이름일 것.

대부분,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공간으로 변모할 것은 당연하다. 디지털 삶을 즐기는 곳이 우후죽순처럼 도시 곳곳에 등장할 ‘디지털 생활 전문점’은 대세가 될 것. 그 공간의 주인공들은 바로 DAO 참여자들이다. 특히, DAO에 먼저 참여해 암호화폐를 꾸준히 모았기에, 여기서 생긴 가치가 새로운 디지털 세상의 새 힘이 되고 있다. 이 새 힘은 새로운 기득권층이 삼삼오오 모이는 공간을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 것이다.

이즘에서, 새로운 ‘디지털 생활 공간’을 찾는 DAO 참여자의 면모를 다시 살펴보자. 이들은 나이나 경력이 먼저가 아니다. 전공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느냐도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단지, 암호화폐를 미래의 가치로 제대로 보려는 노력이 얼마나 있느냐다. 그래서 미래의 가치를 얼마나 모았고, 그 모은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느냐가 중요하다. 하루 멀다 하고 등장하는 암호화폐의 가치를 꾸준히 해석하고, 그래서 잘 선별한 그 가치가 계속 커지리라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 이들이 모이는 곳, 바로 DAO Club의 등장이다.

◆새 문명을 선도하는 DAO Club
지금까지 컴퓨터 생활로 인해, 디지털 인간으로 전환되는 것 같은 나는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멋질까 고민을 해보았다. 그 방안의 일환으로 SNS 생활의 형태를 직시하면서, 결국 ‘미래의 디지털 삶’이란, 서로 행복을 공유하는 대안의 하나로서, ‘디지털 가족 공통체’ DAO의 일원으로 살아가리라는, 지금까지의 공동체와는 다른 형태로 변화되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DAO, 그 꿈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아직 들여다보면 텅 빈 디지털 공간, 그곳으로 향해 가는 그 DAO 속 사람들은 어쩌면 다음 차례 문명으로 가는 징검다리의 그 첫돌을 놓으려는 선지자일지 모른다. 그 돌이야 언제라도 땅이 되어 묻혀버리겠지만, 지금은 그 돌을 놓기에는, 몇몇이 들기에 너무 무겁다, 아무리 밀어도 움직거리지 않는, 지금이 무겁다. 그래도, 이 글처럼, 어느 누군가에 의해 꿈틀거림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제, 블록체인의 생활화 바람이 막 나비의 날개에서 일지만, 이 바람은, 불과 30년을 넘기지 않고, 태풍이 되어 우리 생활을 한꺼번에 바꾸게 될 것이다. 바로 블록체인 시대다. 이 시대를 막 지나면서, 우리는 맞고 틀림이 아닌,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해, 의사결정의 결정체로 삼는, 양자기억소자와 그 다음의 바이오기억소자, 그 엄청난 메타버스 시대를 갑자기 맞이할지 모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메타버스로 향하는 지구촌은 수많은 연구와 그 기술 개발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미, 첨단 문명의 정점에 오른 다국적기업일수록 DAO 성격의 디지털 커뮤니티를 자체 육성하거나 흡수 통합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기득권 유지를 향한 치열한 경쟁의 산물. 물론, DAO 중심의 세계가 연결될수록 1인 기업이 발달할 것. 따라서, 이들 1인 기업이 오래 가려면, DAO를 통한 상호 교류의 장이 잘 펼쳐져야 한다. 

이러한 디지털 세상의 온라인커뮤니티가 한층 발전하려면, 아무리 인간과 아바타가 공존하는 세상이 되더라도, 당연히 인간 중심의 오프라인커뮤니티를 통해 실제 감정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많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즉, 먼저 떠오른 내 멋진 생각을 말하고, 함께 토론하다가 웃고, 또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정을 나누는 곳, 바로 새로운 길거리에 생기게 될, 디지털 문화의 으뜸이 될, DAO Club 빌딩이다. 

◆메타버스 씨앗, 그 DAO Club 빌딩이 보이는 풍경
지난 몇 년 동안, 좋은 DAO가 만든 길거리 DAO Club에서 서로 충만한 행복을 나누고, 갑자기 닥친 소식에 서로 위로도 하는, 그러한 곳이 생겨나서, 오래 오가며 머물면 어떨까 하고 상상했었다. 물론, 잠깐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경우는 더러 봤지만, 국내 유명 회사가 직영하는 DAO Club, 더 나아가 그 빌딩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빌딩이나 빌딩 밀집 지역이 생길 것이고, 이로 인해 삶이든 행복이든 그 정체성이 바뀌리라는 것이다.

최근,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국내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국 사람 몇이 세계적인 IT 기업을 외국에 설립했다는 것. 미국의 Coinbase에 이어, 이스라엘 ORBS와 함께 블록체인 컨설팅업계의 2위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일 정도라는 것, 다국적기업이 되어가고 있는 TNC IT Group이라는 것. 

혹여, 20세기 들어서, 역사가 현대에게 준 선물이 컴퓨터고, 컴퓨터가 이 사회에 주는 선물이 블록체인이라면, 그 블록체인이 한국인에게 주는 선물이 TNC IT Group과 같은 회사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는 지나친 허구요,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무척 낯간지러운 아부일지 모른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한국인 누구라도 세계 다국적회사를 만든다면, 언제라도 백번 얼굴 긁어도 부족할 테니.

몇 번 더 희망하고 싶은 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어떤 블록체인 선두 회사라도, 컴퓨터 빌딩에 만들어지는 DAO Club 사람들을 위해, 지구촌마다 이 특별한 선물을 주면 어떨까? 새로움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밤낮없이 들락거리며, 스스로 미래의 가치를 조성하는 공간, 바로 세계 길거리 곳곳 펼쳐지는 새 브랜드의 ‘DAO Club 빌딩’이라는 선물이다. 

조만간, 세계 어디를 가도 암호화폐로 결제하는, 디지털시대의 싱싱한 느낌이 들락거리는 곳이 생길 거다. 아날로그 세상의 ‘스타벅스’, ‘코스타’, ‘던킨’ 등 작은 공간을 뒤로하고, 디지털 세상의 문화를 선도하는 ‘OOO’라는 브랜드의 첨단과학 빌딩이 세워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길 바라는 것이겠으나, ‘메타버스’ 문명의 새 씨앗이 한국부터 먼저 심어진다면? 꿈속에서라도, 나는 그 씨앗에 물 주러 하루에 한 번은 갈 것이다. 아무리 멀어도 뛰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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