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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블록체인 뉴스분산시대, 그 희망을 향한 카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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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블록체인 뉴스분산시대, 그 희망을 향한 카덴차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2.04.1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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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밈비 이사 / 시인

◆내 뉴스, 내 욕망의 다른 이름
NEWS, 뉴스는 인류가 만든 단어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참 중요한 단어다. 종이가 아닌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습관이 붙은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최근 들어, 뉴스가 ‘나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 것은 필연인 듯도 하다. 좀 늦게 세상에 눈을 뜬 것이었을까? 아니면 세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 채 우왕좌왕 살다 보니 늦은 것이었을까? 아마, 모두 맞을 듯하다.

가끔 컴퓨터 공간에 삶의 일지를 남길 때마다, 나 또한, 뉴스, 그 새로움에 대한 강한 욕구는 항상 존재해 왔던 것 같다. 굳이 더 강조하지 않더라도, ‘새롭다’라는 이 말은 어쩌면 인간이 진화해온 가장 큰 힘의 원천이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것에 노출된다. 점차 자라면서 배우는 모든 것이 새롭다. 그러니, 뉴스를 보고 듣는 일은 서고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습관화된 것이리라. 

새로움을 갈구하려는 내이 본능은, 어쩌면 내 욕망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끊임없는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니, 이 새로운 즐거움을 먼저 맛보고 싶고, 새로운 곳을 먼저 가고 싶고, 새로운 방법을 먼저 해보고 싶은 것. 그렇다. 어쩌면, 내가 찾는 뉴스는 내 욕망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내 뉴스는, 이렇게, 나를 한 곳에 정체하게 하거나, 내 정체된 사고를 부수기도 한다. 이즈음에선, 뉴스는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내 욕망의 절대 표지라는 느낌마저 들 수밖에.


◆정말 모든 뉴스를 믿을까요?
현재 보도되고 있는 뉴스는 거의 과거형이다. 미래형 뉴스는 드물다. 뉴스 즉 News 자체 단어가 가진 속성, 바로 ‘내가 모르는 지금까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가감 없이 먼저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물론, 그 속엔, 뉴스를 생산해 내는 이의 원래 뜻과는 다르게, ‘내가 모를 미래 사실’이란 예측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점차 뉴스가 우리 몸에 좋을지 어떨지 의심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왜일까?

대부분 뉴스에 맹종하다시피 살아가는 것이, 힘의 세습처럼, 오랜 전통처럼 내려오고 있음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삼삼오오 국가들이 세계를 삼삼오오 나누어 마치 내 것인 양손으로 조몰락조몰락하고 있다. 어떤 때는 뒤통수를 때리거나 서로 줄을 바꿔 세우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쯤에선, 뉴스는 그 몇 기득권자의 권력 유지 수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뉴스 독점자에 대응해 나를 지키는 방안은 있을까? 새로운 것을 조율해 가는 그들 뉴스 보다,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 내가 거짓에 오염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스스로 확신을 가진 만큼, 또 그 확신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큼, 우리 자신을 더 즐겁게 하진 않으리라. 물론, 개인의 시간과 공간에 한계가 있기에 뉴스란 단어가 생겼겠지만. 내 마음에 드는 뉴스 반, 아닌 것 반, 이러한 뉴스 오염의 불확실성에서 나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블로그, 카카오, 페이스북, 트위터, 정보검색사이트, 유튜브 등 SNS를 통해 내가 직접 뉴스를 고르려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컴퓨터 세계도 자연 일부다’라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이다. 많은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실을 바탕으로 뉴스를 생산해 내고, 또 함께 공유해 열람하는 일, 컴퓨터도 식물이나 동물 혹은 광물처럼 자연의 하나일 수밖에 없어야 하는 연유다. 그러니, 모든 유명 매스컴마다 경쟁하듯 들어와 박히는 뉴스를 듣느니, 차라리 SNS에서 솔직함이 드러나 있는 뉴스를 찾아가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컴퓨터가 삶을 급속히 바꿨다
컴퓨터가 사용되어 산업에 도입되기 시작한 지 70년이 넘었다. 뉴스가 이끄는 대로 사는 일반 사람은 처음엔 컴퓨터는 ‘게임을 하는 기계다’라고 취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활형 컴퓨터로서 직장의 필수품이 되면서, 생존 수단으로 등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형화 고성능화 된 것. 초창기, 사람을 달에 먼저 발을 내딛는 데 필요했듯, 어떤 경쟁에서든 이기고 싶은 욕구가 컴퓨터 발전을 부추겼을 것이다. 컴퓨터 기술은 1990년대부터 정보통신기술 이란 이름과 혼합되면서 사회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바야흐로 타자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인터넷이 우리 생활 일부로 되었다. 이메일 등장으로 팩스가 사라지면서 모든 일은 인터넷에서 시작해 인터넷으로 끝난다는 말도 생겼다. 

이제 스마트폰을 대부분 사용한다. 즉, 인간 신체 일부가 된 지, 불과 10여 년이 되었다. 처음엔 익숙지 않아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더니, 점점 그 분실률이 줄어들었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 습관 때문일 것. 스마트폰은 들고 다니는 고성능 컴퓨터다. 아마 더 작아져, 몸에 붙어다니면서 그 다른 이름이 등장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컴퓨터에 의한 삶의 변화는 새로운 용어를 알리기 바쁜 뉴스의 정의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스마트폰 발전의 끝을 모르는 요즘, 메타버스라는 말 중심으로 눈 깜짝할 사이마다 뉴스가 만들어지고 있다. 수십 년 가까이 컴퓨터를 놓지 않고 살아온 필자로서, 아무리 그 뉴스를 뿌리치려 해도 포로가 먼저 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절대 권력에 고개를 쳐들어 똑바로 보고 싶음이 미래 어느 시점에 내 얼굴을 대할 때마다 덜 후회할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좀 천천히 발전하도록 만드는 뉴스가 나왔으면 해서다. 무조건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봐야 한다는 인간 속성의 뉴스가 더 솔직해지기를 바라는 염원에서다. 


◆절대자본가를 위한 암호화폐 세상
이제 향후 10년이면 신체 속으로 신뢰/신용을 나타내는 전용칩이 다양하게 이식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아마 30년이면 우리 생각만으로 주변 사물을 조작한다고도 하고. 상상하기 힘들지만, 우리 의식을 내 몸이 아닌 곳에 저장될 수도 있다고 한다. 더 발전할수록, 너무 빠른 변혁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자칫 컴퓨터 능숙자와 신분 격차를 느끼는 일도 생기리라.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뉴스에 등장한 블록체인. 불과 10년 남짓 지난 블록체인 이론은 우리 생활의 또 다른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전 세계 동시다발적인 화폐개혁을 일으키기에 좋은 구실을 제공하고 있는 암호화폐는 이미 일상 용어로 발전하고 있다. 전통적 화폐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는 이러한 새로운 발전을 다음 2개의 배경으로 나누어 보면 어떨까.

첫째, 초기 암호화폐는 자본의 양극화 현상에 대응해 일반 대중에 의해 먼저 개발되고 전 세계에 급속히 퍼졌다고 한다. 이는 산업이 발달할수록 그 자본 격차가 벌어졌기에 대다수 중산층 이하의 경제 자유 욕구로 인해 생겼다고 한다. 그 이후, 기존 자본가들에 의해 수집되고 있다는 것. 국가별 디지털화폐로 전환되는 것은 일정 순서를 밟는 통과의례일 뿐이라는 측면이다.

둘째, 블록체인 이론과 기술은 절대 자본 기득권 세력 그들에 의해 기획된 것이라는 추측이다. 오일달러 이후, 무한대의 통화 발행과 지하자금 축적 등이 세계의 화폐개혁을 불러왔고, 달러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축통화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국면이라는 것.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발전하고 있는 암호학을 체계화시켰고, 새로운 컴퓨터 속의 화폐로 발전시킴으로써 미래 자동화 세상의 그 가상세계에 적용하기 위해 개발되어가고 있다는 측면이다.

그러나 어느 측면이든, 너무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시점에선, 어느 뉴스든 어떤 시류든 그 진실을 파악하는 일이 하늘 별 따기다. 지금 작금의 세계는 블록체인 기술의 기반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자산을 암호자산으로 자리매김을 해 새로운 가치로 다시 탄생시키고 있다. 이렇듯,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NFT라고 약칭하는 대체불가토큰이 만들어지고, 이들 코인이나 토큰이 사용되는 메타버스라는 가상세계가 구축되고 있다. 이는 현실세계 인간을 가상세계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저 메타버스라는 세상에서, 제2 아니, 제 N의 삶을 살도록 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특히, 반드시 승부가 판가름 나야 하는 게임이라는 인간 욕망을 분출 과정 말이다. 결국 이 과정이, 인간 개인 저마다의 삶이겠지만, 다가오는 시간마다 계속 만들어지는 뉴스라는 이름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다.


◆MetaVerse, 저 세상은 제2의 지옥
지금의 저 메타버스에 대한 뉴스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절대자본가와 그 근처 식구들만의 특권이라고 보여진다. 같은 내용을 언급해도 그 받아들이는 강도는 자본의 힘에 비례한다고 한다. 어느 언론에서 보도했느냐도 문제지만, 어느 누가 먼저 말했느냐가 뉴스의 신뢰도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도 절대자본가에 의해 거대 언론 매체가 그 서열을 매기고 있지만. 이렇게 뉴스는 일반인에게 필요에 따라 다르게 전달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렇듯, 임의로 생산되는 뉴스는 절대자본가가 나를 세뇌시키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이를 알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의 뉴스에 길들어져 왔다. 나만 그 뉴스의 말을 안 들으면, 왠지 배고플 것 같고, 질 것 같고, 그러니, 나도 모르게 고분고분 ‘메타버스라는 뉴스의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찌 틀린 행동이라 여길 것인가. 서로 먼저 받으려고 줄 서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메타버스! 세계 몇몇 절대자본가들의 가장 큰 계획 중 으뜸은 아마도 지구를 자신들만이 사는 곳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과연 나 한 사람만이 처음 상상해 보는 것일까? 아니다. 많다, 아니 누구나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능력이 닿을 때까지,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극단 이기주의자들의 당연한 권리일 수도 있겠다. 뉴스를 생산하지 못하는 나는, 언감생심 근처엔 얼씬 못할 테니, 그래서 어떤 감정도 생기지 않지만! 

세상 돈을 거의 다 쥐고 있으니,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메타버스라는 뉴스의 후속 조치들을 손바닥에 놓고 따지게 되리라. 이 메타버스라는 가상세계에 모든 인간을 가두어 놓고, 이 지구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잘 교육된 인간들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곳에 살게 할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영원불멸 낙원을 만들려는 것은 아닌지, 뭐 이런 엉뚱한 생각도 든다. 제2의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보려는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이 상상이 틀리길 바랄 뿐이다. 혹시 내일의 먼 내일, 22세기를 바라볼 즈음, 잠잘 때도 조작된 꿈속에서 행복한 상태에 존재하려는 인간의 욕망 극치가 저 하늘을 찌를 듯하리라. Mind Uploading에 의해 인간도 저장도구의 한 매체로 사용되었다는 뉴스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인간 마음을 기록함으로써 인간을 모든 매체의 하나로 사용하는 시점이 올 수도 있다. 그땐, 결국 일부 절대 자본 지도자만의 먼지보다 작은 즐거움 같은 것이 되겠지만. 


이렇듯, 인간 욕심이 만드는 지구의 메타버스 세상은 태양계를 벗어나 그 어디쯤 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 그 어디란 지옥일 것 같다. 지옥도 자연의 일부라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나 인간 욕심의 끝은 파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만의 시각은, 한갓 일시적인 객기에 기인한 것이기에, 순식간에 사라지는 뉴스 조롱거리가 되리라. 그래도 좋다. 다만, 이렇듯, 나같은 오기라도 부리는 이가 많아지길 바랄 뿐.


◆블록체인의 힘은 사실 기록
설령 일시적이긴 하겠지만, 메타버스의 모든 기록이 블록체인 공간에 존재해야 한다는 믿음이 계속되길 바란다. 그래야 그나마 지구가 몇몇 절대 자본가 손에서 좌지우지되는 일은 최대한 늦춰지리라 믿고 싶으니까. 물론 일정 시점이 지나면, 그나마 지구나 위성에 있는 블록체인 플랫폼을 몽땅 소유하는 그 자본가의 것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러한 세상이 오지 않길 바라는 굴뚝같은 마음이야 어찌 다 나열할 수 있을까.

블록체인의 힘은 사실의 기록이다. 모든 뉴스도 사실에 바탕을 두는 기록의 일종인 것. 즉, 블록 상에 뉴스가 한 번 기재되고, 그 블록이 일단 체인에 연결되어 기록되고 나면, 절대 수정할 수 없다. 또,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누구나 그 뉴스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일단 기록된 후, 그 기록을 수정하려면 수정된 뉴스를 새 뉴스로 기록해야 한다. 따라서, 뉴스를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책임 소재가 발생한다. 그렇기에 허위나 예측성 뉴스를 만드는 일은 사실을 다른 거짓으로 덮으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절대 자본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뉴스가 나올 때까지 뉴스를 만들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범죄다. 물론 이들은 이때마다 법을 바꾸기도 한다. 법이 바뀌고 나면 범죄가 아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을 입맛에 맞게 바꾸어 가면서 말이다. 그러니, 지구 역사는 승자 중심의 기록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하다. 힘 있는 사람들 간의 다툼에서 이긴 측의 이야기가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 그들만의 기록이 조작되어왔고, 많은 사람이 그 조작된 뉴스 공장에서 나온 뉴스란 상품을 사서 본다. 

그래도 지금 희망은 지구에 블록체인 이론이 일반 상식이 되고, 누구나 양심에 따라 자신들의 기록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시기가 도래하리란 것. 인간 개개인이 기록하는 시대를 향해 갔으면 좋겠다는 것. 블록체인 이론은 그렇게 완성되어, 교통신호 지키듯, 모든 원칙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개인이 직접 실시간으로 확인한 사실만이, 모든 과정이, 뉴스란 이름으로 남겨지기를 바란다. 당연, 나부터 먼저 SNS 한 조각에 정확한 자료를 남겨야 하는 이유다. 누구나 정확하게 남긴 후라면, 누가 승자가 되어도 상관없다.


◆뉴스분산시대를 향한 카덴차
언제라도 뉴스를 움켜쥔 사람들이, 원하면, 유행병 팬데믹이나 전쟁을 만들 것이다. 이렇게 전 인류나 지구가 몸살을 앓는 것처럼, 그들 뉴스가 홍수처럼 급속히 블록체인에 얹히기 위해, 온갖 기록 매체들이 앞뒤를 모른 채 들썩거리는 듯하다. 세상은 ‘독재인 뉴스독점시대’에서 ‘자유인 뉴스분산시대’로 넘어가는 몸살인 듯. 더 몸살을 앓지 않아도 되는, 단 한 번의 몸살을 위해, 마지막 몸살을 위해, 모든 뉴스를 분산해 관리하라는 의미에서는 블록체인 이론이 생긴 것은 아닐까? 이렇듯, 뉴스분산시대가 되었으면 하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인간 힘이 하나로 모여져 이 첨단 기술을 실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뉴스분산시대 다음은 뉴스생략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과학 발전의 극한상황 그 끝의 끝자락마다, 인간 즐거움이란 그냥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그 어떤 과정만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엉뚱한 추측 때문이다. 인간 존재감이라든지 즐거움이라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 하는 그 어떤 감정도, 이를 나타내는 그 어떤 뉴스도 순간 스치는 한 점 바람으로 느껴질 그런 시대엔 말이다.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먼 미래, 그 어느 즈음 뉴스생략시대에 사는 그 누군가는, ‘오늘은 무엇을 하며 지낼까?’라는 걱정을 하며, 하루 일년 백년을 지낼 것 같다. 어떤 뉴스를 듣지 않아도 살아갈 테니, 먹고 자고 노는 일이 싫은 것인지 좋은 것인 구분 안 될 테니, 이러한 유토피아 같은 세계에서는 어떤 의미로 살까 하는 걱정, 참 행복한 걱정이다.

혹자는 말할 거다. 그러한 유토피아는 이론일 뿐이다. ‘이론과 실제는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사이에서 수레바퀴는 영원히 구르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설파한 철학자도 또 생겨날 것이다. 이러한 걱정을 방지하기 위해, 그 혹자는 다시 뉴스를 입맛에 맞게 만들어 내리라. 그땐 정말 사치스러운 이런 뉴스는, 블록체인 공간이 아무리 많이 남아도, 누구나 예뻐하는 자동 방지 프로그램이 거부하길 희망해 본다. 

이럴지도 모른다. 뉴스에 의해 사는 일이 싫다고 외치는 소리도 뉴스일 텐데, 그런 뉴스를 거부하려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속속 등장하겠거니와, 그 미래의 또 미래 컴퓨터는, 우스꽝스럽게도 장난삼아, 그 어떤 뉴스도 생략할 것 같다. 과연 뉴스가 필요 없는 시대가 올까? 뉴스가 생략된 세계는 어떨까? 하하, 난 쓸데없이 욕심이 많다.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 조금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니! 

info@blockchai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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