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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스마트폰 100년, 디지털트윈시대 행복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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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스마트폰 100년, 디지털트윈시대 행복 엿보기 
  • 블록체인투데이
  • 승인 2022.01.0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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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시인 / 블록체인산책 저자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 늘어날수록, 디지털트윈(Digital Twin)이란 단어가 조금씩 익숙해져 온다. 지금 사는 현실이 그대로 컴퓨터 속의 가상세계와 서로 오가려는 사회 현상이라 보인다. 갑자기 생길 것 같은 메타버스라는 허공버스를 타고, 스마트폰으로 뭐라고 떠들며, 이쪽 허공에 대고 뭐라 뭐라 하다가, 저쪽 어딘가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아니 동시에 왼손 오른손 하듯 오고 가는 것. 디지털트윈 세상의 다른 표현이다.

4차산업혁명이란 용어가 오르내린 지 불과 5년 남짓 지나는 시점에서, 벌써 가상현실혁명이란 말이 서슴없이 나타나고 있다. ‘모든 이론이란 곧 현실이 된다.’라는 말이 메아리가 되기 전에, 지구촌은 너나없이 메터버스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알량한 스마트폰, 아니 극소형 컴퓨터를 몸속에 심고 다니게 되니 무엇이든 가능하다며 말이다.

과학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 욕망의 극치를 이루는 속도가 극도로 짧아지고 있음을 다시 느끼는 것은 너나없을 것이다. 인간 저마다 삶의 목적들이, 그 특정 목적을 향하는 것이겠으나, 결국 거대기업 중심으로 유토피아라는 또 다른 메타버스 세상 구축을 향해 진화하고 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선진국일수록 다른 국가에 뒤지지 않으려, 극도의 방어벽을 쌓고 국가 전체를 디지털시티로 구축하고 있는 실정. 이에 뒤질세라, 개인 모두 조금이라도 먼저 가상세계에 올라타려는 요즘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누구의 것이다.’라는 말을 다시 하기 무섭게, 최근 들어, 메타버스 플랫폼 구축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늘고 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 때 땅의 금 캤듯, 블록체인 시대 때 인터넷의 금 캐듯, 저 메타버스 시대 때 인간의 금 만들어 가지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허공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라 느껴진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이론과 시간 뒤에서 껄껄 웃는 이가 있다. 그들이 어딘간 분명 있을 텐데 하면서도, 나는 코앞 돈과 돈이 부딪히는 것들로 인해 잊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자랑스럽게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 고장 날 만하면, 간신히 살만한 푼돈을 주었다 뺏었다 하는 사람들 존재를 아예 외면하고 싶은 듯, 조금 전 과거는 내 것이 아니라며, 나 또한 숨 쉴 때마다 허공에다 내 몸을 버리고 사는 것이었다.

그랬다. 전 세계 사람에게 찔끔찔끔 돈을 풀었다 조였다 하는 극소수 사람이 있다. 결국, 그 절대 자본가 몇몇이 지금까지의 모습처럼 저 가상세계의 영원한 기득권자가 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기득권자로 사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물려준 지구 다루는 비법을 전수받은 사람들, 그렇게 자신들만의 딴 세계를 구축하며 사는 사람들의 영원한 권리인 듯하다.

멀리 보면 볼수록, 법은 돈 많이 가진 자들을 중심으로 변하는 것 같다. 그들이 요소요소 일을 꾸미고, 그 일을 뉴스로 꾸미고, 전체 여론을 조성해 규칙들을 만들어 간다. 그 규칙을 법으로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일련의 순환 고리를 위한 방아쇠는 그들의 몫이었다. 방아쇠가 당겨질 때마다, 그 총구는, 무엇인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메타버스라는 가상세계로 모두 달음박질하도록, 그 방향성을 만들고 있다.

가까이 볼수록, 참 황당하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이 사뭇 못마땅하다. 같은 사람이라니, 영원한 기득권자임을 알면서도 지구에 함께 살아가야 한다니, 참 싫다. 내가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들도 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인가? 그들도 내가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은 하고는 있을까? 분명, 나와 달리 느낄 것이다. 내가 다르게 느끼는 것처럼. 참으로 지구는 서로 다른 많은 세상이 존재하는 것, 맞다.

물론, 그렇다. 나는 그들 절대자본가와 비교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신만의 즐거움을 느끼고 사니까. 그 즐거운 가치는 서로 고귀한 것이니까. 그런데도, 그 많은 사람 대부분은 그 고귀함을 깜빡 잊을 때마다 비교하곤 한다. 돈이 더 있든 아니든 그렇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라도 더 가지고 싶은 내 욕심에 내 슬픔을 만들고 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눈 벌겋게 뜨고 지켜보곤 한다. 뒤돌아볼 때마다, 무엇이 행복인지 몰라, 스스로 울고 웃는 우스꽝스러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무엇을 할까. 디지털트윈 시대를 바라보며, 나는 어떤 행복의 정의를 유지해야 할까. 몇몇 절대자본을 중심으로 ‘헤쳐모여’ 해야 하는 시대를 미리 앞당겨 걱정하는 것은 아닐까. 아마 그랬을 거다. 과거 수없이 반복된 새로운 세상이 오고 또 올 때마다, 그때마다 누구나 상상하지 않았던 목표를 내 꿈이라 여기고, 그 꿈을 이루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 우겼을 거다. 앞선 누가 이루었으니, 내 꿈도 이루어지리라 앞만 보며 그렇게 우기며 행복하게 살았을 거다. 지금도 꿈이 행복이라 믿고 싶으니까.

억울하지만, 그런데 말이다. 내가 만드는 내 행복감을 위해, 드러낸 내 욕심을 감추고 싶은 이즈음에선, 지구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이젠 뭐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고,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나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쓱 둘러보아야 한다. 그래, 이 어찌 위안 삼아 살아가지 않을 수 있으랴. 분명, 나는 현실과 가상이란 세계 그 어디에서나 채이며 오락가락하는 그 많은 사람의 하나인 것을.

그러니, 스마트폰이라도 들고 뭐라도 하며 살아야 한다. 아니 최신형 스마트폰이나마 가지고 놀고 있어야 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이런저런 노는 일을 해가며 있어야 하는 것. 하, 진짜 같은 이 지금 세상이든, 가짜 같은 저 가상 세상이든 뭐든 가릴 것 없이! 나 같은 나와, 아니 내 아바타와 그 무엇이라도 하며. 이땐, 정말 새롭다는 말이 일반 대중의 입에서 사라진 이후일 것 같다. 

그렇다. 당장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나를 향해 웃고 다녀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트윈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을, 그 어느 시대에도 그랬을, 나를 위한 행복일 것. 그야말로 욕심부리지 말고. 스마트폰이 작동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에서 밥이 떨어지는 디지털트윈 시대에는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것이 곧 행복인 것이다. 하하,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허허! 그것참, 허허다. 위와 같이 써놓고 보니, 참 어이가 없다. 내가 아무리 99.99% 사람 중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참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사람마다 한계상황에 부딪히면, 그 극한상황을 순식간에 뛰어넘는 멋진 순간은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다, 맞다! 그러니, 뭐 낙담할 필요는 없다. 당연지사, 내가 아니라 하더라도, 향후 많은 분들이 디지털트윈 시대를 살아가는 그때마다 저마다의 행복론을 쏟아내고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길 바라지만, 자, 이제 고집을 부릴 때다. 저 디지털트윈 세상을 위한 몸속 양자통신장치든, 지금 내 스마트폰이든 뭐든, 어디에 대고라도 외쳐야 할 때다. 직접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먹고, 그래서 내 몸으로 내 땅 딛고 있는 일, 이 일을 소중히 느끼는 것만이 죽어도 변하지 않는 행복이라고. 스마트폰으로 하늘을 가리고, ‘나 없다!’ 하는 옹고집이 되더라도, 100년이 더 지나 또 지나도 끝까지 외쳐야 한다. 내 몸은 내 마음, 내 마음도 내 몸의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자연의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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